독락당(獨樂堂)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깊은 계곡을 끼고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세조 시절의 공신인 손소(孫昭)의 외손자로 양동마을에 살다가 이곳 독락당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회재의 아버지인 이번(李蕃)은 이곳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자연을 즐기며 살았는데 회재가 7살때 아버지 이번은 돌아가셨습니다.
훗날 회재는 김안로에게 저항하다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조정에서 파면당하게 되는데, 당시 그는 본가인 양동마을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둘째 부인과 7년간 은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정에서 당장 사약을 받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을 때를 묵묵히 기다렸죠. 왜 이언적은 본가 양동마을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을까요? 독락당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회재 이언적의 7년간 은거의 삶이...
독락당 주변은 동쪽으로는 자계천을 끼고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와 세심대 등 독특한 반석들이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고, 계곡을 따라 700미터 즘 내려가면 옥산서원과 세심대의 풍경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은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및 도덕산 등의 산들에 둘러쌓여 독락(獨樂)하기엔 천혜의 장소였습니다. (옥산서원과 세심대는 다음에 기회봐서 자세히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자계천은 내가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느낌이 들기엔 충분한 곳이였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여기서 초가를 짓고 살던 회재. 그가 자계천 세심대에서 느꼈던 느낌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세심대에서 은거하던 회재 이언적이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지, 결국 다시 이으려고 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이제 독락당(獨樂堂)으로 들어가 볼까요?
'홀로 즐겁다'는 독락(獨樂)이란 말에서 보듯 외부에 대하여 철저히 폐쇄적이고 은둔을 하려던 회재의 의지가 공간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재의 심정을 반영하듯 담벼락 보다 낮은 지대에 집 터를 닦고 건물의 기단을 낮추고 마루도 지붕도 낮게 만들어서 마치 잔뜩 웅크린 집으로 보였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바깥에서는 담과 지붕만 보이게 설계가 되어있었고 어느 문을 쳐다보더라도 집안을 바로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폐쇄적으로 지어진 곳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곳의 이름인 독락(獨樂)이란 당호는 맹자 '진심장구' 상편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독락이란 당호는 홀로 즐기며 속세의 권세와 부귀를 잊고 지내려는 회재의 마음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내가 상상하는 그는 독락당에서 도피 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유자적하려는 모습보다는 재도약을 위한 기다림으로 보입니다. 맹자의 '진심장구'에서 말하듯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는 말은 열리기를 기다리며 독락(獨樂)하는 것을 역설하는 듯 합니다.
<독락당 입구의 솟을대문>
입구의 대문격인 솟을대문이 행랑채보다 한껏 치솟아 있습니다. 솟을대문의 높이는 옛사람들이 집 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었어요. 그래서 집 주인과 품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큰 가마나 말을 탄 집 주인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길죽하게 솟아있는 솟을대문이 반드시 필요했지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집 구조가 아주 독특하다는 느낌을 먼저 받게 됩니다. 대문부터 집안의 끝까지 단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은거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구획을 나누는 문들도 마주보는 일자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엇갈리거나 직각으로 배치해서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또한, 단번에 뛰어 들어갈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여러 단계의 절차에서 회재의 독락(獨樂) 의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경정재>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별채와 정면에는 위 사진의 경정재가 보입니다. 경정재는 현재 2칸의 방과 3칸의 창고, 그리고 화장실겸 욕실로 한칸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경정재의 2칸 방에는 에어컨과 냉장고 그리고 TV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편리함보다 그 당시 선비들의 삶을 느끼고 싶어 역락재에 머물었는데 거기엔 이런 사치품(?)이 없는 정말 지나가는 선비의 방이였습니다.
대문 하나를 더 들어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왼쪽이 방금 보았던 경정재, 오른쪽에는 역락재와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오기 위해서는 지그재그로 달려있는 대문을 3개나 열고 들어와야 합니다.
<역락재>
이 방이 제가 하룻밤 머문 '역락재'입니다. 들어가는 입구가 아주 아담하죠? 역락재의 현판은 그 유명한 명필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집니다. '역락(亦樂)'은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 에서 따온 말이니 아마도 회재를 기억하는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잠시 머물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당시의 선비들처럼 회재를 생각하며 '역락재'를 빌려 하루 머물렀습니다.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니 그아니 즐거우랴'
이제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옥산정사, 보물 제 413호>
보통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홀수칸으로 짓는게 보통인데요, 옥산정사는 정면4칸, 측면2칸의 짝수로 지어진 독특한 별당입니다. 지금은 제일 왼쪽 한칸만 온돌을 깔고, 오른쪽 3칸은 대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제일 오른쪽 한칸은 온돌을 깔았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대청2칸은 문짝을 단 흔적인 문설주가 남아있었어요. 즉, 옛날에는 대청에 문이 있었단 이야기지요.
정면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인 '옥산정사'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안쪽에 보이는 '독락당'이라 적힌 현판의 글씨는 영의정을 지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쓰셨습니다. 제가 묵은 날은 주인장 마저도 없었고 사람이라곤 저 혼자 있었습니다. 옥산정사 마루에 혼자 걸터 앉아 회재도 이랬겠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앞에서 말했듯이 독락당은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도, 한번에 집 안 깊숙히 뛰어 들어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외형상으로는 외부의 시선은 차단하고 있지만 좀 더 깊숙히 들여다보면 옥산정사 대청마루에서는 시냇물을 볼 수 있도록 동쪽으로 담장 가운데 창살을 내놓아 외부와의 소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청마루에 앉아 이 창살을 통해서 옥산계곡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오른쪽의 대청마루 창문과 왼쪽의 담벼락 가운데 난 창살을 통해서 계곡을 볼 수 있습니다. 독락당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정을 둘러보고 밖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한번 이 곳을 역으로 둘러보겠습니다. 이제 쑥밭을 지나 계정으로 들어갑니다.
이 집을 처음 들어왔을 때의 느낌은 '미로같다' 입니다. 이 집에서 가장 절정의 풍경은 아마도 옥산정사 뒷쪽에 있는 계정(溪亭)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정에서 자계천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정에서 파면당한 회재의 당시 생각을 옅볼 수 있습니다. 집의 구조로 보아 세상에겐 문을 닫아버렸지만 자연으로는 오히려 문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양진암 편액>
계정은 일명 '양진암'이라고도 하는데요, 왼쪽에 양진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 편액의 글씨도 퇴계 이황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어요. 퇴계는 회재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아마도 그의 학문을 기리는 마음으로 퇴계가 이 편액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양진암의 암(菴)자를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의미하는 암(菴)자를 붙였을까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보건데, 독락당의 북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정혜사지'란 사찰이 있었습니다. 회재가 어린시절 정혜사지에서 글공부를 했었고 김안로를 탄핵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벼슬에서 쫒겨나 이곳에 머무를 때도 정혜사의 스님과 깊은 교류를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인연으로 해서 자신의 집, 그것도 가장 아끼는 계정의 옆에 붙여서 '양진암'을 만들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제40호>
정혜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이 덩그러니 탑만이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계정>
이 편액도 '석봉 한호'가 쓴 글씨랍니다.
<계정에서 북쪽방향의 계곡을 바라본 모습>
독락당에 머물면서 이언적이 가장 좋아한 곳은 바로 이 계정이었겠죠.
<계정에서 남쪽방향의 계곡을 바라본 모습>
계곡의 물은 정말이지 맑습니다. 한참동안 발을 담그고 앉아서 계정을 바라봤습니다.
계정은 집안이 아닌 세상 밖에서 바라봐야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별채와 사랑채 사이에 계곡 방향으로 이런 작은 길이 나있습니다.
자계천 쪽으로 나왔습니다. 옥산정사에서 바라본 작은 문이 사진 왼쪽처럼 이렇게 보이는군요.
자계천 계곡에서 바라보니 옥산정사의 오른쪽 창문이 정확히 보입니다.
우리의 옛 건물들은 얼마나 이쁘게 짓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자연과 어우러지느냐'인 것 같습니다.
현대에서도 참 보기 힘든 아주 멋진 건축사상이라고 생각이드네요.
<무심한듯 세련된듯 조용히 흐르는 자계천>
<자계천에서 계정을 바라본 모습>
마침 비가 부슬부슬 오는 바람에 더 운치가 있었습니다.
제가 간 이 날은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어요.
회재가 제가 느낀 것을 느꼈을까요? 완벽히 문명과 차단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경험이였습니다.
<독락당의 꽃 '계정'>
계정은 자계천을 건너 조금 떨어져 바라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실제로 보면 더 장관입니다.
계정을 멍때리며 보고 있자니, 비가 점점 많이 내립니다. 빨리 역락재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독락당 주인어른께 전화가 걸려 옵니다.
'문 잘 잠그고 주무시고, 잘 쉬다 가시라고...'
볼 일이 있어 이곳을 저에게 맡기고 출타하셨습니다.
<역락재 방안 모습>
역락재는 경정재와는 달리 TV, 에에컨, 냉장고 등 문명의 산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옥에서의 하룻밤에서 저런게 꼭 필요하시다면 역락재가 아닌 경정재에서 묵으시길 추천드립니다.
제가 간 날의 기온이 30도 정도였는데도 에어컨이 없어도 방안은 으슬으슬 추울 정도로 시원하더라고요.
회재 이언적을 흠모하던 많은 선비들이 이방에 묵어 갔겠지요.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니 그아니 즐거우랴.
아침은 탁탁탁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작은 문을 열어보니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옵니다.
새벽에 잠을 깨는 습관은 없지만 이날은 새벽부터 정신이 맑아져서 잠을 계속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뜨고 작은 문을 여니 제 신발 위에는 개구리 한마리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
지금부터 경주를 구석구석 구경하러 떠납니다.
떠나는 길에 만난 호기심 많은 송아지. 문턱을 넘고 나에게 오려고 안달입니다. ㅋㅋㅋ
독특한 고택에서 하룻밤을 생각하신다면 경주의 독락당도 좋습니다.
화장실도 밖에 있고, 에어컨, 냉장고도 없는 불편한 방이었지만 불편함을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 멋진 추억이 될 겁니다.
<경주 독락당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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