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경계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과 외설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 <은교> 또한, 개봉당시 외설이냐 예술이냐, 더럽다, 아름답다,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영화였습니다. 기존 영화에서 실행하지 못했던 적나라한 정사 장면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 더 논란이 되었죠.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적나라한 성기와 음모 노출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70대의 늙은 시인 이적요(박해일)와 17살 고등학생 은교(김고은)의 이룰 수 없지만 치열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몇 몇 장면과 늙은 시인의 여고생을 향한 상상을 두고 '외설이다',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 영화는 늙은 시인의 말할 수 없는 가슴속의 사랑을,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예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존중하겠습니다. 자, 영화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예고편
◇ 봄볕을 매달고 그녀가 온다.
이적요(박해일)은 시인이자 국문과 교수, 문학계의 대부이지만 자신은 이미 늙어버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혼자 밥을 차려먹은 뒤, 거울 앞에서 옷을 모두 벗어보지만 거울 속에는 이미 늙어 축 처진 몸뚱아리가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어느 날, 은교는 담너머에서 봄날같은 화사함을 매달고 적요 앞으로 달려옵니다. "은교 왔구나." 적요는 중얼거립니다. 아무도 몰래 쓸쓸히 죽어가는 요새같았던 그의 집은 어느새 화사한 햇살이 들고, 나무들이 푸르러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늙어버린 적요의 육신처럼 탁해진 유리창을 닦고, 책상위의 먼지를 닦고, 노인의 가슴에 자신의 것과 꼭같은 새문양의 헤나를 그려줍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상징인 '헐~'이라는 말도 가르쳐줍니다. 화사한 봄볕과도 같은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노인은 다시 젊은 시절로 되돌아 가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꿈을 꿉니다.
◇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영화에서 시인 이적요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 은교? 젊음? 이런 것들이 적요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라면, 서지우는 정확히 반대로 적요의 문학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상상속에서라도 오롯이 내것으로 있기를 바라는 적요는 서지우와 그녀와의 성교하는 장면을 훔쳐보며 아들과도 같던 제자 지우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갈망하며 찾아 헤매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의 본 모습이 아닐까요. 이 사건을 노인의 추잡한 욕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은교' 즉 '은빛다리'가 그에게는 어린시절 공산당으로 부터 자신을 구해준 열일곱 살 누이이자,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상상속의 사랑이고, 영원한 마음속의 처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극중 이적요의 이 대사는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늙을 지라도 정신마저 늙는 것은 아니기에 노년에 나에게 찾아온 사랑의 풋풋한 감정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하지만 섬세하게 표현된 노인의 감정과 얼굴에도 불구하고 70대 노인의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던 점은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적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면, 영화는 노인의 상상을 통해 그를 어린시절로 돌려놓으며 이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정확히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이적요의 심리상태를 아주 휼륭하게 표현해 낸 연출력과 박해일의 연기력이 눈에 띄긴 하지만,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소설의 내용을 기대하고 본 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리메이크를 만든다면 이적요 배역에 '박근형' 할배를 적극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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