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개인적으로 역사가 깊은 도시를 여행하는 걸 참 좋아합니다. 500년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경기도 지역에서는 정조대왕이 천도를 추진했었던 수원이란 도시도 정말 매력적입니다. 수도를 한양에서 수원으로 옮긴다라... 이것은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더라도 대단한 개혁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에서 가깝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자신의 새로운 친위세력을 육성하고 변질된 붕당 노론이란 집권세력을 견제해서 왕권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정조대왕은 수원 천도를 위해 계획도시를 만들고 주변으로 수원화성(수원성)을 쌓았는데, 그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49세에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그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지금에 와서 우리들의 눈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반짝이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유산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속에는 조선 후기의 황금기 한 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수원이란 도시에 있고요!
이런 수많은 이야기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고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박물관, 수원화성, 화성행궁 이렇게 네 곳이 있습니다. 이 네 곳은 기특하게도 통합관람권 한 장으로 모두 구경할 수 있는데요, 오늘 저와함께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수원'이란 도시를 '여행지'라고 생각하지 않은 분들을 참 많이 보는데, 수원이란 도시는 그 어떤 도시보다 더 한국적이고, 여행자들이 구경할 곳이 다양하게 많은 곳이에요. 게다가 쇼핑과 독특한 먹거리까지 많은 곳이라 최근에는 해외여행객들에게도 아주 인기있는 곳이죠.
통합관람권 가격은 위와 같습니다. 이 표 한장으로는 수원화성, 화성행궁,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 이렇게 네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만약 따로 따로 모두 매표를 하게 되면 성인 기준으로 6,500원이 필요하지만, 통합매표를 하면 3,500원에 볼 수 있으니 3,000원 정도 저렴합니다. 판매는 각각의 매표소 어디서든 구매할 수 있고요, 연무대 앞과 서장대의 화성열차 타는 곳에서도 똑같이 구매할 수 있습니다. 결제는 현금/신용카드 모두 가능하고요, 12세 이하 어린이와 65세 이상 노인, 국가유공자와 장애인, 그리고 그들과 동행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1. 수원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은 영통구 이의동에 있는데요, 수원에서 용인으로 향하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약 시내버스를 이용하신다면 경기지방경찰청 정류소에 하차해서 용인(동수원IC)방향으로 10분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갑신정변 13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2월 22일까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 볼게요.
이런 전시물들을 보고 있자면 그 시절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은 욕구가 확~ 올라오네요. 이 종이는 1884년의 '갑신정변 호외'인데 갑신정변이 발생한 12월 4일 밤부터 7일까지 일본공사 일행이 인천항으로 도피하는 정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로운 세상을 향한 3일간의 이 기록은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민씨 수구파를 처단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일본의 배신과 청나라의 군대가 창덕궁으로 진입해서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지요.
근대 우편제도의 시작과 갑신정변의 서막은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정총국의 초대 총판은 '홍영식'이었는데, 그는 정변의 주역이자 고종을 최후까지 호위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에요.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의 반역 소식에 자결을 해버렸고, 큰 형 홍만식 또한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자결했습니다. 이들 삼부자는 서로 추구하던 이상은 달랐지만 혼란스런 시대를 관통한 비극적인 시대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특별전시관에는 이외에도 홍씨 일가에서 내려오던 유물들과 갑신정변에 관련된 많은 전시물이 있더군요. 아무튼, 130년 전 이들이 품었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꿈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찬찬히 둘러보면 재미있습니다.
일반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수원시의 과거와 현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오래 전 수원 시내를 재현한 곳인데, 수원갈비의 시작점이었던 '화춘옥'도 보이네요. 새마을운동이 한참이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들렀던 집으로 이름나 있죠.
다른 한 쪽은 한국서예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자체에선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서예 전문박물관이에요. 이곳에선 우리나라의 서예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주요 전시물로는 영조, 정조의 어필을 비롯해서 한석봉과 김정희, 그리고 송준길 등등 조선 명필가들의 글씨를 다수 보유하고 있더군요.
전시물이 많아 어떤 사진을 보여드릴까 고민을 많이 했네요. 혹시 '흥국사'란 사찰을 알고 계십니까?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폭설을 만나 그곳에 하루 머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산천을 하얗게 뒤덮은 설경이 아름다워 즉석에서 시를 지었습니다. '朝來心有喜(조래심유희) 아침이 오니 즐겁기 그지없구나), 尺雪驗豊徵(척설험풍징)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으니 올해도 틀림없이 풍년이 들겠구나)'라는 싯구(詩句)를 써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하사했는데, 사진 오른쪽 족자의 글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재미있는 전시물이 있었는데 가장 왼쪽에 보이는 '송죽(松竹)'이라 적힌 족자는 일곱 살이었던 영조가 적은 글이에요. 글 뒷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영조가 이 글을 쓰는 것을 보았다는 인장도 찍혀있습니다. 흥미롭네요. ^^*
이 편지는 영조가 암행어사 김종정에게 내린 봉서인데, 전시물 아래 설명에는 내용이 없지만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편지에 보면 지역이 적혀있는데, O모양으로 영조가 몇 번 지우고 지역을 바꾼 흔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웅천(진해), 그 다음엔 기장으로 적었다가 O표시로 지우고 '고성'으로 고쳤는데요, 이는 봉서를 내리면 출발하기 직전에 읽어야하는데, 김종정이 미리 읽어버려서 지역을 바꿨다고 합니다. 내용은 '고성'의 수령이 흉년, 재난 등으로 힘든 백성을 잘 보살피고 있는지 알아오라는 내용입니다.
+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매표시간 : 오전 9시 ~ 오후 5시(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 휴관일 : 매월 첫 번째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
<찾아가는길>
2. 수원화성과 관련 된 역사이야기 '수원화성박물관'
이곳은 수원화성을 걸어보기 전이나 후에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꼭 들러봐야할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수원화성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축성 당시 조선의 생활상과 조선의 22대 정조대왕의 생각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이곳 1층에서는 특별 전시가 항상 열리는데 몇 개월 단위로 전시물이 계속 바뀌더군요. 여름에는 개관 5주년 기념으로 수원시에 기증받은 각종 유물들을 전시했었는데요, 지금은 2월 1일까지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에 관해 전시하고 있네요.
정조시대는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삶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수입도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습니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농업 생산성을 안정시키고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는데,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윤음을 직접 지어 내리며 농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자신에게 글을 올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글은 전국에 인쇄되어 배포되었는데 정조실록에 의하면 농소를 올린 사람은 27명, 농서를 바친 사람은 40명이었다고 하네요.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 1794년 (정조 18년) 가을은 수원화성과 신도시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에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정조는 화성성역 공사를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화성 북쪽의 빈 땅에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수리시절을 조성할 것을 명령했는데요, 이 문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서 위로는 한글 번역까지 해두어서 관람객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박물관 2층에는 화성 축성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화성축성실과 당시의 정치/문화/군사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화성문화실 두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책은 빼놓을 수 없지요. 이 책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입니다. 1794년 수원화성 착공부터 1796년 완공되기까지의 모든 사항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요, 축성 당시 투입된 인부들의 숫자와 인건비, 투입된 재료의 숫자와 가격, 당시의 물가, 감독자는 누구였으며 실무자와 장인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런 업무를 진행하면서 왕과 주고 받은 서류와 도면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기록정신 정말 본받을만 하지요?
이곳에 오셨다면 반드시 봐야할 초상화가 한 점 있는데, 바로 채제공 초상 일괄-시복본 [蔡濟恭 肖像 一括-時服本]입니다. 이 초상화는 어디서 많이 보셨죠? 지금은 돌아가신 오주석 교수님의 책인 '한국의 美 특강'에서 최정상급 초상화라고 성찬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후기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입니다. 현재 보물 제1477-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그림에는 73세의 채제공이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 관복 차림에 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앉아 좌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초상화는 사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림에서 보일런지 모르겠지만 초상화에는 검버섯과 흉터, 그리고 털 한올까지 모두 표현되어 있어요. 분홍색 옷에는 옅은 파란색이 비치는데, 그것은 그림 뒤편에다 그렸다고 하네요. 참 대단합니다. 심지어 채제공은 눈이 사시인데 그것까지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상화에 사람의 손은 잘 그리지 않는데, 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는 이유는 저 부채와 향낭을 정조가 하사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특별전시 때, 저 향낭의 실물과 부채를 선물했던 정조의 편지를 공개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더군요. 그 때를 기다려야 하나봅니다.
'장용영'이라... 이 글은 편액을 탁본한 것인데 정조대왕은 문무를 균형 발전시키기 위해 규장각과 장용영을 같이 설치했습니다. 이 시대에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두 기관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인데요, 현대인들은 장용영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요. 이유는 정조가 죽고 장용영이 해체되어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 글은 김종수가 쓴 장용영의 편액의 탁본입니다.
+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매표시간 : 오전 9시 ~ 오후 5시(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 휴관일 : 매월 첫 번째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
<찾아가는길>
3. 조선후기 황금기를 엿본다. '화성행궁'
이번엔 정조가 일년에 한 번 이상은 다녀갔다는 '화성행궁'을 둘러보겠습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지방에 갔을 때 잠시 머무는 임시 궁궐을 말하는데, 조선 22대 왕인 정조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가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이곳의 항상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인데, 정문인 '신풍루'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24기 상설 공연이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열립니다. 지금은 이 공연이 잠시 중단되었는데, 수원시립예술단으로 새롭게 업그레이드하여 올해 4월에 다시 재개할 예정입니다. 이 공연은 정조의 명령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 고수인 백동수가 조선의 무술과 일본, 중국의 무술에서 우수한 점을 조합해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는데요, 정조의 최정예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들이 갈고 닦던 스물 네가지의 무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봄에 경기도청 벚꽃축제 할 때 쯤, 이 공연을 다시 볼 수 있겠네요.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600살이 넘어 지금도 살아 있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조선의 모든 역사를 몸소 겪은 이 나무는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하는데요, 쪽지에 소원을 적어 나무 주변으로 매달아 둘 수 있어요. 저도 소원을 적어 줄에 매달았습니다.
팔달산을 뒤에 끼고 있는 이 건물은 봉수당(奉壽堂)인데요, 화성행궁의 정당(正殿)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곳입니다. 봉수(奉壽)의 뜻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라는 뜻으로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아들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곳은 행궁의 오른쪽 끝에 별도로 떨어져 있는 '화령전'입니다. 이곳에도 '운한각'이라는 전각에는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고 있는데, 몇 년 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은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운한'이란 은하수를 뜻하는데 돌아가신 정조의 혼백이 나라의 어려움을 보살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순조가 직접 썼다고 하네요.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순조가 쓴 원래 현판은 사라지고 지금은 1975년 화성 복원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하지 않지만, 봄/여름/가을에는 행궁 안의 여러 곳에서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지로 부채를 만들어 볼 수 있고, 떡매를 쳐서 떡을 만들어보거나, 손수건에 염색도 해볼 수 있고, 도자기를 만들기도 하고, 전통기법으로 액세서리나 꽃을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체험은 요일에 따라, 계절에 따라 내용은 달라질 수 있는데, 이 행사도 봄에 벚꽃축제 할 때 쯤 다시 재개될 예정입니다.
+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 ~ 18:00, 동절기(11월~2월) 09:00 ~ 17:00
+ 매표시간 :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 휴관일 : 연중무휴
<찾아가는길>
4. 정조의 꿈이 담겨있는 '수원화성'
먼저 수원화성 전체 지도를 보겠습니다. 총 길이 5.7km의 성곽은 걸어서도 둘러볼 수 있을 정도지만, 화성열차란 기특한 탈 것이 있어 그것을 이용하면 좀 더 재미있고 수월하게 이곳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위 지도에서 빨간색 선으로 되어 있는 서장대와 연무대 간의 3.2km의 코스는 화성열차를 이용할 수 있고요, 나머지 2.5km는 걸어서 돌아볼 수 있습니다. 거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건강한 노인분들은 충분히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코스랍니다.
본 포스팅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수원화성은 정조가 노론세력을 견제하여 새로운 친위세력을 키워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수원 천도를 구상하고 만들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는 단순한 효심에서 나온 사안이 아니고요, 폐해가 극심했던 당시의 붕당정치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이 더 컸습니다. 결국 4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수원화성은 개혁적인 계몽군주였던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지금부터 살포시 걸어보겠습니다.
먼저 동장대(연무대)에 도착하면 남여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궁체험장이 있어요. 국궁체험 가격은 2천원인데 운영요원의 안내에 따라 사용법을 잠시 배우고, 화살 열 발을 곰의 얼굴을 하고 있는 과녁으로 쏘아 볼 수 있습니다. (곰은 원래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과녁이었습니다.) 이 활은 체험용으로 만들어져서 시위를 당기는 데 그리 힘들지 않고요, 손도 아프지 않더군요. 다들 재미있어 하니 체험 꼭 해보세요.
그리고 이제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화성열차를 타봐야겠죠? 화성열차는 서장대 아래의 팔달산과 연무대 두 곳에서 왕복 운행하고 있습니다. 차가 없는 여행자는 다리가 편안해서 좋고, 차를 가져오신 분들도 왕복으로 돌아오면 되니 크게 부담이 없습니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니 기특하죠?
팔달산과 연무대에서 출발시간과 이용요금은 위 사진과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운행을 하지 않으니 날씨가 애매한 날은 위 사진의 전화번호로 꼭 연락해보시고 가셔야 낭패를 보지 않겠죠? 화성열차는 연무대 ↔ 화홍문 ↔ 장안문 ↔ 장안공원 ↔ 화서문 ↔ 팔단산 코스로 가는데요, 주변 경관을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이렇게 4개 국어로 설명을 해주고 있더군요. 소요시간은 편도로 약 25분~30분 정도 걸립니다.
이곳은 수원화성의 북쪽에 있는 정문인 '장안문'입니다. 한양을 바라보며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임금이 수원을 들어올 때, 이 문을 지나 들어오게 되는데, 장안문은 서울의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보다 규모가 더 큽니다. 한국의 성곽 문 중에서는 가장 크죠. 왜 지방 도시에 이렇게 큰 문을 만들었을까요? 그것도 이름을 버젓이 '장안'이란 이름을 써가면서 말입니다. '장안'이란 말은 조선의 도읍을 의미하는 말인데, 정조 임금이 화성행궁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곳을 도읍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반증이 되겠습니다. 다른 증거로는 화성행궁 안에 보면 '노래당(老來堂)'이란 전각이 있어요. 노래(老來)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건데,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화성열차에서 내려 짧은 코스는 걸어서 성곽을 걸어볼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원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은 지금도 화홍문(華虹門)을 지나 옛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고요, 팔달문(남문)과 장안문(북문), 그리고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옛 길은 여전히 수원의 주요 도로망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기능만 여전한 게 아니라, 풍경까지 옛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밤이 되면 수원화성은 조명을 받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는데, 특히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사진가들에게 아주 인기있는 곳이죠. 위 사진 좌측이 화홍문이고요, 우측 언덕 위에 있는 전각이 방화수류정입니다. 화홍문은 수원화성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에 지어진 수문인데 장마철에 범람을 막고 적의 침투를 막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여름에 수량이 많아 일곱 개의 수문으로 물이 흐를 때 무지개가 피어 오르는데, 그래서 화홍문의 '홍(虹)"자가 바로 '무지개 홍虹'자를 쓰고 있습니다.
방화수류정은 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과 정자의 목적을 겸하는 독특한 건물인데, 18세기의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현재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저곳에 올라서면 작은 연못인 '용연'이 내려다 보이는데 봄이 되면 분홍색 연산홍과 알록달록 철쭉으로 장관이 펼쳐집니다. 물론 겨울에 눈이 내려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정조대왕의 백성들을 아끼는 덕으로 인해 10년이 걸릴 공사를 2년만에 완공했습니다. 그렇다고 난림공사가 아닌 전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성곽으로 자리잡고 있는 수원화성은 그 기능을 보나 미적 감각으로 보나 세계 최고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5.7km 성벽을 둘러 보시고 그를 왜 '대왕'이라고 부르는지 몸소 느껴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음 편은 수원에서 볼 수 있는 달콤한 벽화골목 총정리편이 이어집니다. 그때까지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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