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어도 감성은 여전히 펄떡이며 살아 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 <레옹, 1995> 또한 그런 영화 중에 하나인데요, 재작년에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끝내고 재개봉 할 만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재개봉 당시 1995년 국내 개봉 때 삭제되었던 23분의 분량이 추가되었는데요, 무자비한 킬러 레옹(장 르노 분)과 열두 살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분)와의 사랑 이야기가 미국과 한국의 현지 감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해서 당시 편집해서 개봉했었죠. 당시 찌라시 언론에서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해 배드신이 있다는 (마치 정사신인 것처럼) 루머까지 퍼뜨리며 클릭 수를 올리려는 추태까지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레옹과 마틸다의 아슬아슬 줄타는 감정 줄다리기는 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인데, 뤽 베송 감독이 약을 먹지 않은 이상에 그런 장면을 넣을 리 만무한 일이죠.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죽인 기억이 고통스러워 평생 누워서 잠들지 못하는 킬러와 온 가족이 몰살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범인을 찾아 죽이고 싶은 소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보듬고 보살피는 이들의 애정 어린 교감은 대단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미와 예술성이 뚝뚝 흐르는 이런 영화를 두고 '배드신' 운운하며 독자를 낚아대며 '소상공인'화 되어버린 언론이 한편으론 딱하기도 하네요. 아무튼...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한 손엔 우유 2팩이 든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엔 화분을 들고 정처 없이 떠도는 킬러 레옹. 어느 날, 그의 아파트 옆 가족이 괴한에게 몰살 당하는 장면을 문 구멍으로 목격하는데, 그 사이 심부름을 다녀 온 마틸다는 가족들이 죽는 모습을 보며 위험을 직감하고 복도 끝에 있는 레옹의 집 벨을 누릅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마틸다는 집안 일과 레옹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레옹은 그녀에게 안식처와 복수를 위한 무기 사용법을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둘은 가까워지게 되는데, 마틸다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레옹은 난생 처음으로 뿌리내려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가족을 죽인 사람이 부패한 형사 '스탠스(게리 올드만 분)'임을 알게 되고 복수를 결심합니다.
23분의 삭제된 장면은 마틸다가 악당에게 권총을 쏘는 장면과 평생 살인으로 괴롭게 살아온 레옹이 그녀에게 위로 받으며 처음으로 침대에서 함께 잠이 드는 장면인데요, 첫 번째는 미성년자가 총을 쏘는 장면이 적절치 않다는 데서였고, 두 번째는 정사 장면이 없더라도 가족이 아닌 성인 남성과 미성년 여성이 함께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잠만 자는 것이지만 '배드신'이란 이름으로 원초적인 호기심을 심어주는 것도 좋지 않긴 하겠습니다만, 처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남녀 주인공의 감정 줄다리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둘의 교감 장면은 매우 중요했다는 뤽 베송 감독의 의도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킬러와 소녀 사이에 흐르는 교감과 아련하고 애절한 사랑은 복원된 장면에서 더욱 무르익습니다.
평생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킬러는 항상 화분을 하나 가지고 다닙니다.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고, 언제나 나를 반겨주며,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을 너에게만은 뿌리를 내려주고 싶다는 의미일까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그에겐 이 화분이 장래 희망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다 마틸다를 만나게 되고 '희망'은 그녀에게로 전이되고 또 희망을 담은 화분은 마틸다에게로 전이됩니다. 결국 학교로 돌아간 마틸다는 학교 마당에 이 화분을 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가 좋겠어요, 아저씨." 마침내 그는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겁니다.
우유를 마시고 화분을 사랑하는 킬러, 킬러에게 찾아온 열두 살의 소녀,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연애 감정. 영화 <레옹>의 매력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순 속에서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들에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악역 연기의 교과서라 불리는 게리 올드만의 악당 형사 연기는 압도적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콘텐츠 속에 패러디 되고 재생산된 이 영화는 언제 보더라도 그 감동은 여전한 것 같군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전설의 엔딩곡, 스팅의 'Shape of my heart'까지... 금상첨화!
✔ 댓글이 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