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뭘 한다고 이 영화를 지금에서야 봤을까요. 드디어 포털 다운로드가 가능해져 최근에야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를 봤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각자 취향은 모두 다릅니다. 세련되고 신선한 시나리오를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B급 정서가 가득한 약간은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클리셰에 환호하는 사람도 분명 있죠. 킹스맨은 딱 후자의 영화입니다. 섬세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오래된 영화의 오마주도 많은데다,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원탁의 기사 '랜슬롯'이 등장합니다. 21세기에 아더 왕의 충직한 부하인 랜슬롯의 등장이라니... 하지만 이 영화는 B급 감성이 주는 독특한 카타르시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킹스맨은 청불(청소년관람불가) 영화답게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곳곳에 등장하는 폭력들은 현실적인 잔혹함으로 표현되지 않고 좀 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가 잘리고 터지는 난폭한 피의 향연을 형형색색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음악으로 재치있게 포장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네요. 그리고 영화의 줄거리도 매우 단순한데요, 악을 물리치는 스파이의 임무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라는 기존 스파이영화들이 가지는 서사구조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튜 본 감독은 '오늘 진흙탕에서 맘껏 즐겨보자고!"라며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포스터의 "스파이 액션의 새로운 시대가 온다!"라는 카피문구답게 이 영화는 과거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을 끊임없이 비틀고 패러디합니다. 포스터부터 007시리즈를 닮았는가하면, 캐릭터나 무대미술, 그리고 무기 또한 007에서 많이 차용을 했는데요, 숀 코네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이 활약하던 시리즈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겐 옛 첩보물 향수가 떠오를 거에요. 특히, 로저 무어가 출연했던 1981년 <007 유어 아이스 온리>의 포스터를 재치있게 패러디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랜슬롯이 소음총으로 위스키를 가져오는 악당을 쓰러뜨릴 때 "짠~"하는 효과음 또한 007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피흘리는 모습은 싫어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보다 잔인한 악당 '발렌타인'을 연기한 '사무엘 L. 잭슨'은 그가 출연했던 1994년 작품 <펄프 픽션>의 악당 캐릭터 대사들을 맛깔나게 패러디하고 있는데요, 해리(콜린 퍼스)를 총으로 쏘기 전 "현실은 영화와 달라."라고 말하는 장면은 펄프 픽션에서 줄스 윈필드 역으로 상대를 쏘기 전 성경을 읊어대는 장면이 떠오르고,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대접하는 장면에서 맥도날드 빅맥보다 치즈버거가 낫다는 대사는 펄프픽션에서 웬디스와 버거킹 중 어떤 햄버거가 맛있는지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이 생각나며, 해리가 에그시(태론 에거튼)에게 전해준 죽은 아버지의 훈장은 펄프픽션에서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유품인 금시계를 버츠에게 전해주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게다가 발렌타인의 충직한 부하 '가젤(소피아 부텔라)'의 절단된 두 다리 의족에 장착한 날카로운 칼날은 <킬빌>의 우마 서먼이 휘두르는 무엇이든 자를 것 같은 칼날과 흡사합니다. 이처럼 킹스맨에는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아우르는 영화들 중에서 유난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패러디하고 있는데요, 특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3분 44초의 롱 테이크 살육전 장면은 한국영화 <올드보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배튜 본 감독이 밝힌 적도 있었죠. 이전 영화들의 숨겨진 보물을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재미도 깨알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에 맞춰 유명 인사들의 머리가 형형색색 불꽃처럼 터지는 장면은 잔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막히게 아름답습니다. B급 정서의 아쌀함이 최고네요. 그리고 영화가 끝나도 지구의 입장에선 인간은 바이러스 같은 존재라는 발렌타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이 영화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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