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연히 전쟁영화를 많이 보네요.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프랑스 감독인 크리스티앙 카리옹의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2005>인데, 유럽판 <웰컴투 동막골>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서부전선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독일, 프랑스, 영국(스코틀랜드)군은 하루 동안 휴전을 맺고 같이 샴페인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축구경기까지 하며 기적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후방에서 지휘하는 뚱뚱한 지휘관들은 반역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지옥 같은 전장에 있는 병사들에겐 삶의 소중함에 뼛속까지 감사했을 밤이었을 겁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하루 동안만이라도 평화를 찾고 싶었던 병사들의 일탈. 적국의 사람들은 병사든, 아이든, 여자든 모두 죽이고 점령해야 한다던 본국의 지휘관들은 전선에서 죽음을 코앞에 둔 병사들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실제 이 사건은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인데, '크리스마스 휴전(The Christmas Truce)'이라 이름 붙어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마치 훈훈한 동화 한편을 보는 것 같지만 이 기적 같은 영화의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14년 12월 24일.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북부지역에는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독일, 프랑스, 영국(스코틀랜드)군은 참호를 파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폭격과 백병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던 겨울 밤, 신부의 신분으로 입대한 스코틀랜드 병사는 백파이프를 불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 하는데, 독일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참호 위로 올리고 노래로 화답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시체가 널려 있는 중간 지점에서 세 나라의 장교들은 하루 동안 휴전을 하기로 결정하고 병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파티를 벌입니다.
병사들은 가슴속에 간직했던 아내의 사진을 서로 돌려보기도 하고, 적국에 살고 있는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기도 하며,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 서로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동료애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가족사를 아는 적국의 병사들은 이제 아픔을 서로 공유한 동료가 되었는데, 서로에게 총을 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의 철조망을 걷어버린 군인들은 폭격 정보를 서로에게 알려주며 자국 참호에 적군을 안전하게 숨겨주는 일까지 일어나는데, 이쯤 되면 전쟁에서 이겨야한다는 목적은 적어도 최전방 병사들에겐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일선 병사들은 왜 싸우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적'이라는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 악마 같은 지시를 내리는 탐욕스런 정치인과 지도자에게만 명확할 뿐...
이 날 이곳에 있었던 세 나라의 병사들은 모두 '이적행위'를 한 반역자의 오명을 쓰지만, 농사짓다, 노래 부르다 입대한 이들에겐 애초에 이 전쟁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독일인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조리 몰살시켜야 한다며 신은 우리 편에 있다고 떠드는 몰상식한 영국의 목사, 경제적 탈출구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하는 독일의 탐욕스런 지도자들, 이들에게 국민의 행복 따윈 이미 관심 밖 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인간적인 '일탈'이 우리 같은 지배 받는 사람들에겐 더 공감되고 감동적이네요.
전장에서 참호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고양이가 한마리 있는데, 세 나라의 병사들이 각자 다른 이름을 붙여 돌봅니다. 사는 곳과 언어만 다를 뿐 이들 모두 하나의 마음이란 걸 고양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적을 더 많이 죽이고 화끈한 화력을 쏟아 부어 승리로 이끄는 험상궂은 전쟁영화보다 저는 이 영화가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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