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 석굴암이 있다면 경남 함양에는 서암정사가 있습니다. 이곳은 아주 작은 규모의 사찰인데 풍경이 매우 이채로워서 제가 제2의 석굴암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뭐 역사적인 가치나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애초에 경주 석굴암과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평소에 여행중에 잘 볼 수 없는 이채로운 풍경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계곡으로 유명한 칠선계곡을 마주하고 있는 천혜의 절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추성리 갈림길에서 400미터 정도 표지판을 쫓아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서암정사는 생각보다 제법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1년이 넘은 고물 자동차로 올라오니 타는 냄새가 솔솔 날 정도네요. 구불구불 난 산길을 어느정도 올라오면 작은 상점에 주차장을 겸한 곳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2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절간을 만나게 됩니다.
서암정사는 독특하게도 일주문은 없고 대신 양쪽으로 석비가 하나씩 서 있군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백천강하만계류 동귀대해일미수’ 그 뜻은 수많은 강물이 흘러 바다로 돌아가니 모두가 한 물맛이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간은 모두는 다르지만 내 품 안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말뜻인 것 같네요.
석비를 들어와 문득 뒤를 보니 뒤에도 글이 적혀 있군요. ‘삼라만상각별색 환원원래동근생’ 삼라만상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근원은 모두 다 똑같다. 라는 의미이니 앞면의 글귀와 뜻이 유사하네요.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건 참 돌이 많다. 라는 겁니다. 이곳에 절간을 지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바위들을 활용해서 조경을 하고 굴법당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보통은 전각으로 일주문과 사천왕문, 해탈문 등을 만들지만 이곳에는 모두 큼직한 돌을 이용해서 전각을 대신하고 있어요. 석비 오른쪽 바위에는 사천왕상을 세우는 대신 바위에 조각을 해두었습니다. 정말 독특하네요.
사천왕상을 지나니 바로 오른쪽엔 천진하게 웃고 있는 작은 동자상이 비를 피해 바위 굴로 들어가 있어요. 선래중생 차처안락(善來衆生 此處安樂)이라. 뜻은 ‘잘 오셨습니다. 여기가 바로 안락처랍니다.’ 그런데 불교가 아무리 중국의 한자를 기반으로 되어 있다지만, 한글로 적어놓으면 많은 중생들이 읽을 텐데 아쉽네요. 어디다 한글로 번역이라도 좀 해 두시지……
와, 이건 또 뭔가요. 어마어마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입구를 만들고 그 위에 대방광문(大方廣門)이라고 적어 놨어요. 한자로 직역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문이란 뜻인데, 이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화엄의 세계인 경내로 들어가는 건가 봅니다. 다른 사찰에는 보통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그 역할을 하나 보네요. 그런데 그 위로 작게 비로궁(毘盧宮)이라고 적혀 있어요. 이거 제가 혹시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었나요? 아무튼 ‘비로’는 석가모니의 이름인 ‘비로자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석가모니의 궁전이란 뜻이지요.
제가 여태껏 한국의 사찰은 족히 백 수십 곳은 넘게 다닌 것 같은데, 이렇게 이색적인 곳은 처음입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바위와 거기에 조각한 불상들이 있어요. 지리산 깊은 곳에 있어서 더 신비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대웅전은 지은 지 몇 년 안된 것처럼 반짝반짝 거리네요. 그런데 지붕이 굉장히 독특하게 생겼습니다. 국내 목조 건축물 중에서는 아(亞)자형 건물은 순천 송광사의 대웅보전 딱 하나 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서암정사 대웅전을 亞자형으로 지었나 보네요. 이제 전국에선 딱 두 곳 밖에 없는 셈이 되었네요. 스님께 건축가가 누구인지 여쭤보니 조남칠 대목장이 지었다고 합니다.
깎아지르는 바위산 언덕에 스님들의 요사채도 참 탐스럽게도 지어 놨습니다. 끝내주는 지리산 풍경을 바라보며 수양도 배로 잘 되겠습니다. 참 멋지네요.
바위산을 파내어 그 돌로 담장을 쌓고 그 아래로는 연못도 하나 만들어 놨습니다. 한국에 이런 사찰이 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연못 위로는 바위 굴을 파서 석굴법당을 하나 지어 놨어요. 여기가 바로 극락전인데 굴 벽면엔 아미타불을 조각하고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모습도 조각해 뒀습니다. 누가 조각했는지 정말 그 솜씨에 입이 딱 벌어지네요.
극락전 오른쪽 바위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손에 쥔 술병에선 산에서 내려온 약수가 졸졸 흘러 내립니다. 이 물을 마시면 뭔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것만 같네요. 한 모금 마시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볼게요.
사찰 곳곳에는 일반인은 출입을 할 수 없는 굴법당이 있던데, 스님들이 수양을 하시는 곳인가 봅니다. 속세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데다, 따뜻한 건물 속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정진을 하시나 보네요.
여긴 용왕을 모시는 용왕단인가 봐요. 모두 한 조각가가 만든 작품일까요? 얼마에 걸쳐 이 모든 작품을 만들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용왕단은 있는 사찰도 있고 없는 곳도 있는데, 보통 법당 안팎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더러는 이렇게 단을 만들어 별도로 모시기도 하죠. 용왕단을 섬이나 해안가 사찰이 아닌 깊은 산속에 있는 절간에서 이렇게 별도로 모시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용완단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광명운대’라고 적힌 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비로전이 나옵니다. 이곳엔 또 어떤 조각작품들이 있을까 이제 궁금해지네요.
와~ 정말 대단해요! 왼쪽 좁은 돌계단 위로도 용왕으로 보이는 두 분의 조각이 되어 있고, 오른쪽 제법 큰 바위에는 피라미드 형태로 비로자나불이 정말 멋들어지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정말 장관이네요.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이 흐른다면 이 작품들은 모두 국가 보물로 지정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조금 색다른 사찰을 보고 싶다면 서암정사 한번 찾아보세요. 기막히게 아름다운 조각 갤러리를 구경하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함양/남원 여행코스 9편 계속...(연재중)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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