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여유(與猶)한 삶을 따라 '다산유적지' | 남양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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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학자는 누가 뭐래도 '다산 정약용'일 겁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정조는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등용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끄러운 당쟁과 비열한 권력 싸움에서 그는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높은 학문적 완성과 업적들을 기리는 곳이 남양주 조안면 '다산유적지'란 곳에 있는데요. 그가 생전에 이룩했던 업적을 정리한 박물관과 기념관 등이 있고, 그가 생의 마지막에 머물던 여유당, 그리고 부인과 함께 묻힌 묘도 다산유적지 안에 있습니다.


다산유적지는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해 있는데, 마을이 한가롭고 가끔 보이는 가게에서 파는 찐빵도 맛나는 곳입니다.












다산유적지에는 다산문학관, 다산기념관, 다산동상, 사당, 다산선생의 묘, 생가인 여유당, 실학박물관 등 제법 넓은 곳에 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조선 후기에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그를 아꼈던 왕이 죽자 곧바로 누명을 쓰고 귀향지에서 글을 써야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다산의 면모를 조금 알 수 있습니다.






6km 남짓의 수원화성 축조에는 애초에 10년 가량의 공사기간을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다산은 무거운 돌을 쉽게 들고 나를 수 있는 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의 발명으로 수원화성 축조는 2년으로 공기가 대폭 줄어 들었고, 덕분에 국고와 시간은 획기적으로 절약되었습니다. 물론 이에는 정조대왕의 애민(愛民)정신도 큰 몫을 했지만 정약용의 역할이 주요했습니다. 훗날 천주교도란 누명을 쓰고 쫒겨갔던 18년의 유배생활에서도 그는 경제학과 경학 부문에서 500여권의 빈틈없는 저서를 남깁니다. 정치에서의 지역차별과 당색 타파, 세제개혁, 인사정책, 기술개발과 혁신정책, 농민도 잘 살게 하는 이농(利農) 등 오늘날 보아도 옳지 않은 글들이 없고, 앞날을 내다보지 않은 글들이 없을 정돕니다.







다산기념관을 나오니 너른 마당이 있는데, 오른쪽으론 생가가 언덕 위로는 다산의 묘가 보이네요.







정약용 선생의 동상을 보니 실물을 그대로 표현한 건진 몰라도 대단히 잘생겼습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가 인정한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하죠. 드라마 <도깨비>에서 지은탁이 좋아하던 잘 생긴 야구선수 '태희 오빠'가 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진짜 잘생기긴 했나 보네요. ^^*






동상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오면 언덕 위에 작은 묘가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고 하네요. "당신 때문에 우리나라가 빛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아름드리 나무그늘 아래 의자들이 인상깊네요.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과 여유당(與猶堂) 등이 있었습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얻은 호이고, 여유당은 만년에 이곳에서 지은 호이자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의 이름입니다. 여유(與猶)는 "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듯 신중하고, 猶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라"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 말을 잘 믿고 따랐던 다산이 당했던 고초에서 비롯된 이름인데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를 제거하려던 노론은 교활하게도 그의 형을 공격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조선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그 가족도 함께 사직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 다음 해인 1801년, 노론은 이번엔 그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인이란 누명을 씌워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가 만년에 손님을 받았을 걸로 보이는 자그마한 사랑채. 정조가 집권한 초기부터 정약용은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는데, 이를 견제하던 노론들은 그를 끊임없이 귀양 보내지만, 왕은 또 계속 불러들여 수원화성을 축성하게 만드는 등 계속해서 주요 관직에 등용합니다. 훗날 정치에 환멸을 느낀 다산은 낙향했는데, 노론 틈에 정조만 홀로 남겨두고 온 것이 비겁하다 생각하여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갔을 때, 노론에 둘러 쌓인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 하고, 정약용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포항으로 유배형에 처하게 됩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의 권력과 신망이 두려웠던 반대 당파들에 의해, 그의 인생은 '여유(與猶)한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받으며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만년에 여유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 주옥같은 저서를 후대에 남깁니다.


역사는 바로 가려는 자와 거꾸로 가려는 자의 싸움입니다. 결국 거꾸로 가려는 몽매한 자들이 승리하자 조선이란 나라는 반짝이던 황금기를 지나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의 개혁적 지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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