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정혼자가 있는 남자라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려서는 안될테고, 반대로 정부(情夫)가 있는 여자라면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사회통념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란 불확실하고 불균질한 놈은 언제나 다른 이에게 빠질 가능성이 있도록 설계가 되었다는게 문제죠. 그래서 인생사 세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생겼겠지요. 오늘 이야기할 첸커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甛密密), 1997>은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을 통제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방식대로 사랑을하게 되는 다양한 인생사를 이야기 합니다.
17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보았습니다. 젊은시절 보았던 영화와는 완전 다른 영화였습니다. 단순한 사랑의 논리, 사랑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어린시절의 패기는 다 어디로가고, 이제 이 영화속의 다양한 사랑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소정, 죽어간 고모님, 술주정뱅이 강사, 문신한 남자....왜 이사람들의 나름의 방식으로 하는 사랑들이 그때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나이들어 17년 만에 이제야 이해해버린 명작영화가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의 사랑
이 영화에서는 이요와 소군의 사랑 이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랑의 모습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소군(여명)이 홍콩에 왔을 때 만난 고모는 젊은시절 잠깐 만나서 식사했던 미국 영화배우를 잊지 못합니다. 지금은 창녀촌에서 포주노릇을 하고 있지만, 언젠간 그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힘이 그녀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창녀와 알콜중독자 영어강사 양키의 사랑입니다.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은 필요에 의한 사랑을 합니다. 돈을 주는 영어강사, 외로움을 달래줄 창녀... 훗날 창녀가 에이즈에 걸렸을 때 이들은 함께 태국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세 번째는, 소군과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의 사랑입니다. 영화에서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진 않지만, 감독은 분명 이 사랑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이요는 소군의 자전거 뒤에 타고 가면서 묻습니다. 이상(理想)이 뭐냐고... 소군은 고향의 여자친구를 데려와 결혼하는 것이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만들어가는 사랑이 아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사랑입니다.
네 번째는, 이요(장만옥)와 조직보스와의 사랑입니다. 이요는 돈이 필요하고 조직보스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그리고 아끼고 배려합니다. 사랑의 모습이 꼭 한여름 폭풍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이 영화의 주인공 이요(장만옥)와 소군(여명)의 사랑입니다. 만리타향에서 소군은 이요에게 끌리는 마음을 통제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요도 소군과 같이 있을 때 행복함과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에는 타향살이 찌들린, 마치 동지애 같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순박하고 어리숙한 소군은 억척스럽고 약삭빠른 이요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갑니다. 이렇게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사람은 중국 본토의 대중가수 '등려군' 입니다.
그것은 운명이였을까?
이 둘은 설날 등려군 불법테이프를 팔다가 완전히 망한 그날 밤, 같이 잠을 자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불법으로 팔던 테이프의 주인공 등려군을 길거리에서 만나며 서로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 후,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흐르고 만리타향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바로 등려군의 사망소식 때문입니다. 놓칠 것만 같은 인연의 끈이 실가닥처럼 이어주는 동력은 모두 '등려군'이였습니다.
영화 <첨밀밀>은 우리네 인생사의 다양한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갈등구조는 이러한 인연의 끈을 놓치게 만드는 장치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장치는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데요, 중국에 두고 온 약혼녀, 돈 때문에 만났지만 버리기엔 너무 착한 정부(情夫), 원치않았던 결혼, 홍콩의 경제위기, 야속한 뉴욕의 교통신호..... 모두 인연을 위협하는 갈등구조로 다가옵니다.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인연을 위협하는 갈등들을 헤치고 10년 만에 뉴욕의 모퉁이에서 마주한 이들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 겨울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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