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스티브 맥퀸 감독. 당신은 정말 대단한 영화꾼인것 같습니다. 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되길래 이렇게 지독한 명작을 만들 수 있는지 감격스러울 정돕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도는 영화 <셰임, Shame>에 관한 대부분의 리뷰들을 보면 극찬을 하는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맥퀸 감독이 숨겨놓은 수많은 메타포(=은유)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하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전문적으로 영화를 다루는 매체의 리뷰에서도 아직까지 이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여성과의 '관계'에 미친 한 남자의 이야기쯤으로 치부해버리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란 이야기를 받을 정도면 이 영화가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짧은 식견으로 감독이 숨겨놓은 이 영화의 메타포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으로) 조금이나마 밝혀드리겠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성 욕구과잉의 한 남자 이야기로 생각하셨다면 제 리뷰가 아마 반전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군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이 포스팅은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분석임을 미리 밝힙니다.
※ 이 글은 소설가 최민석 작가 의견 인용이 들어있습니다.
감독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 <셰임>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현대의 결혼제도와 가족관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되도록(?) 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즐기려는 약간은 허무주의에 가깝고 '그것'에 미쳐있는 한 남자의 우울하고 과민한 인생살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줄거리는 영화를 흐르는 큰 물줄기의 표면일 뿐입니다. 많은 영화평론가들의 리뷰처럼 '현대인의 허무한 욕망'이란 주제만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영화 속 남매인 '브랜든 설리반(마이클 패스벤더, Michael Fassbender)'과 씨씨(캐리 멀리건 ,Carey Mulligan)의 기행들이 이해되지도 않고 설명이 되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 아래로 흐르는 큰 소용돌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감독이 이야기하는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씨씨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이하 작성하는 글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속 은유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하나 발설하면 남자주인공 브랜든은 여동생 씨씨는 서로를 이성으로서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발설하진 않았지만 아마 이 둘은 어린 시절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브랜든의 회사에서 그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나오는 것은 그가 그 어떤 정신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는 어린 시절 사랑한 여동생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해 버렸고, 더 이상 그녀를 탐하기엔 현대 사회의 규범이 옭아매는 수치심(Shame)에 다른 여성를 탐닉하며 결혼이란 제도를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를 조금 주의 깊게 감상하신 분들이라면 영화에서 여동생 씨씨의 등장이 단순한 주변의 변죽을 울리는 '이벤트'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자동응답기의 목소리는 씨씨였다.
브랜든 아파트의 자동응답기에는 매일 아침 옛 연인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습니다. "브랜든, 제발 전화 받아." 이건 누구의 목소리일까요? 바로 씨씨의 목소립니다. 그는 아침마다 씨씨의 목소리를 듣고 샤워하면서 자위를 하고 출근합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난 어느 여인과 길거리에서 성관계를 가지고 집에 들어왔던 날, 집에는 'I Want Your Love'라는 음악이 매우 큰소리로 울려 펴지고 있었는데, 브랜든은 집에 도둑이 든 줄로 알았지만 알고 보니 여동생 씨씨가 샤워를 하고 있었습니다. 씨씨는 가슴과 음모를 적나라하게 노출한 채 오빠 브랜든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어떻게 들어왔어?"
"나한테 열쇠를 줬잖아!"
"그럼 미리 전화라도 하고 오든가!"
"내가 매일 전화를 얼마나 했는데!!!"
난 뉴욕에서 새 출발을 할 거에요.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서 올라온 씨씨는 뉴욕의 클럽에서 가수로 취직을 했다면서 오빠더러 놀러 오라고 합니다. 다음 날, 브랜든은 직장상사(제임스 뱃지 데일, James Badge Dale)와 함께 그녀가 일하는 클럽에서 그녀가 부르는 '뉴욕 뉴욕(NewYork, NewYork)'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벌써 소문이 나기 시작했네요"
"난 오늘 떠나요, 나를 기다리는 그 곳 뉴욕, 뉴욕"
"최고의 승자가 되고 싶어요. 이 작은 마을의 우울증은 녹아 없어질 거예요."
"난 새 출발을 할 거에요, 뉴욕에서..."
브랜든은 씨씨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여동생이 마음을 담아 부르는 이 가사를 가슴 저리도록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오빠에게 보란 듯이 씨씨는 브랜든의 직장상사와 브랜든의 침대에서 관계를 가집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질투심에 밖으로 뛰쳐나와 달려보지만 오히려 외로움은 더 커져만 갑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보려 직장동료와 연애를 시도하지만, 상처 입은 그는 동료와는 성관계마저도 할 수 없습니다. 여동생을 제외하곤 사랑을 담은 성관계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창녀를 침실로 끌어들입니다.
퍼즐조각을 맞추는 순간 명작이 된다.
이쯤 되면 왜 브랜든이 결혼제도를 반대하는지 아실 겝니다. 현대의 결혼은 가족끼리는 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는 대체 '가족'이란 굴레가 뭐길래 서로 사랑도 못 하게하는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성의 감정을 느끼면 안되는 것인지, 왜 그게 수치(Shame)스러운 일이어야 하는지 분노합니다. 그래서 씨씨가 "우리는 가족이야. 오빠는 날 보살펴야지."라고 말할 때 그가 분노를 한 것입니다.
"난 여태껏 혼자 살아왔어, 난 오빠를 도우려고 해."
"어떻게? 니가 날 어떻게 도와줄 건데? 니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
이제야 영화 속의 이해되지 않던, 또는 별 의미 없이 흘러갔던 대사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녀의 팔에 그어진 수많은 자살시도의 흔적은 그녀 또한 현실이라는 결혼제도와 사회통념이 손가락질하는 수치심의 벽에 부딪힌 적나라한 흔적들입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이러한 사랑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겨먹은 그들의 고단한 인생살이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조금은 어려운 은유의 조각들을 잘 맞추지 못한다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는 영화지만, 이러한 퍼즐조각을 맞추는 순간, 이 영화는 둘도 없는 명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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