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지로의 여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
1983년 <전장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배우 '기타노 다케시'라는 배우를 알고 계십니까? 1980년대 주ㆍ조연으로 맹활약하던 이 일본배우는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로 감독 겸 주연배우로 첫 연출을 시작합니다. 1947년생, 한국나이로 68살이 된 그는 2014년 현재까지도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 조연, 단역, 각본, 연출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일본 대표 명배우라고 하겠습니다. 작년 2013년에는 <아웃레이지 비욘드>라는 영화로 제7회 아시아필름어워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며 그 건재함을 과시했죠.
그의 활약 중에서도 직접 연출했던 영화들의 장르는 정말이지 다양합니다. 범죄, 드라마, 멜로, 코미디, 액션, 판타지, SF 등 장르의 종합선물세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랍니다. 오늘은 그가 활동했던 80여편의 작품 중에서 직접 연출한 총 17편 중,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그리고 잔잔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는 날이 따뜻해지면 언제나 생각나는 영화인데요, 바로 1999년 작품 <기쿠지로의 여름> 입니다. 서정적인 영화라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어떤 영화인지 알아볼게요?
엄마 찾는 9살 소년과 따라가는 52살 야쿠자 아저씨의 이야기.
소년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는 빨간 꽃무늬 셔츠에 천사날개가 달려있는 하늘색 가방을 메고 달려갑니다. 마사오가 달리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가방에서 나는 소립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의 첫장면은 조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영화는 소년 마사오가 어떻게 이런 옷과 가방을 메고 있는지에 대해 역추적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이 빨간색 꽃무늬 셔츠를 입고, 작은 종을 달고, 천사의 날개가 달린 가방을 멜 때, 소년과 아저씨는 세상을 향해 한 뼘 자라게 됩니다.
때는 바야흐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9살 소년 마사오의 여름방학이었습니다. 그는 방학을 싫어합니다. 할머니는 일하느라 늘 집에 안계시고, 친구들은 부모님과 바다로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마사오는 언제나 혼자 집에만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곳으로 돈을 벌로 나가셨다는 엄마의 주소가 적힌 사진을 발견하고 그림일기장과 방학숙제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친구는 아이 혼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신의 야쿠자 남편을 아이의 보호자로 같이 보냅니다. 이렇게 장장 600km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동행하게 된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끔 보던 52살의 건달 아저씹니다. 마사오는 내심 혼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건들거리는 아저씨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엄마를 찾으러 갈 생각은 없고 놀고 싶은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경륜장에서 도박하며 꼬박 이틀을 보내고 슬슬 다시 여행길에 오릅니다. 어느 호텔이 도착한 둘은 먼저 옷부터 여름패션으로 갈아입습니다. 이 때 마사오는 빨간색 꽃무늬 셔츠를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저씨 등에 새겨져 있는 무서운 문신을 발견하고 소년은 밤에 악몽을 꾸지만, 자신을 돌봐줄 사람은 지금 아저씨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길에서 히치하이킹도 하고 걷고 또 걸어 엄마가 사는 곳에 도착하지만, 엄마는 새 가정을 꾸렸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이는 불행한 자신을 버리고 행복하게 사는 엄마의 모습에 슬퍼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급하게 결말보고 끝날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아이와 아저씨에게는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줍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정류장에서 꼬박 하루를 기다려보기도 하고, 나쁜 사람도 만나지만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납니다.
이렇게 돌아오는 길에 겉으로 보기엔 나쁜 사람 같지만 의외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지나던 착한 아가씨는 마사오에게 천사의 날개가 달린 하늘색 가방도 선물하고, 착한 폭주족 형들에게서 아저씨는 종을 빼앗아 마사오에게 주며, 힘들 때마다 흔들면 수호천사가 나타난다면서 아이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빨간색 꽃무늬 셔츠와, 천사날개가 달린 하늘색 가방, 그리고 종을 달고 있습니다. 소년이 묻습니다.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기쿠지로다."
따뜻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영화 속에는 기발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가득합니다. 제목만으로 또는 영화의 처음 장면만으로 잔잔한 감동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금새 착각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12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런닝타임 동안 쉴새 없이 낄낄대는 웃음과 엉뚱한 상황으로 인해 유쾌하고 따뜻합니다. 여행 중에 만난 뚱땡이 아저씨, 문어아저씨, 논밭의 UFO, 수박 터뜨리기 게임, 누두버전의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타잔 흉내 내며 나무타기, 인디언놀이 등 한판 신나게 놀아보자는 듯한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더 놀라운 이야기는 이 모든 상황이 '기타노 다케시'감독이 즉흥적으로 연출했다는 겁니다. 완전한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시작한 기타노 감독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데로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며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리고 이전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절망, 죽음, 복수 등 폭력이 난무했던 영화들을 만들던 그가,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탄스럽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기쿠지로의 여름 OST 'Summer' 피아노 선율도 귓가에 계속 맴돕니다.
▼ 들어보세요, 조 히사이시(JOE HISAISHI)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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