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볼만한 곳 '덕수궁'의 모든 것.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조선 500년의 수도였고, 현재도 역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조선시대 왕들이 머물던 궁궐이 있어서 구경하기 참 좋은 도시죠. 오늘은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서울 가볼만한 곳 덕수궁 산책을 해보도록할게요. 이곳의 입장료는 만25세 이상의 어른만 돈을 받는데요, 1천원입니다. 만24세이하와 만65세 이상 어르신에게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분들은 초등학교시절 소풍을 왔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시민들 중 젊은 사람들은 이곳을 잘 찾지 않는 묘한 곳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름답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궁궐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궁궐이 아니였던 덕수궁은 조선시대에 몇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습니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갔다가 돌아와보니 모든 궁궐이 죄다 불에 타버려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는데요, 어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집이였던 이곳을 임시로 행궁으로 삼았고요,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훗날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고 곧바로 즉위한 순종이 고종의 장수를 비는 마음으로 경운궁을 '덕수'라는 궁호로 바꾸면서 지금의 덕수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대한문 앞에서 사진 한방 찍어주고 안드로 들어갑니다. 전 25살이 넘었기 때문에 입장료 천원을 내야합니다. ㅋㅋㅋㅋ

 

 

 

 

 

 

 잠깐!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알고 갈까요?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궁' 과 '궁궐'의 차이점은 뭘까요?

 

왕이 잠을 자고 먹는 일상생활하는 곳을 '궁'이라고 부르고, '궐'은 업무를 보는 곳을 뜻합니다. 이 둘을 모두 하는 곳을 '궁궐'이라고 부르는데요, 서울에 있는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궁궐 밖에서 생활하다 왕이되면 기존에 왕이 살던 집을 '궁'이라고 부르는데요, 예를들면 고종이 태어났던 '운현궁'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즉, 왕이 살던 집이나 왕족이 궁궐 밖으로 나가 사는 곳을 높여 부를 때도 '궁'이라 부릅니다. 쉽죠?

 

건물의 이름만으로 그 용도를 알 수 있을까?

 

전각의 이름 끝에는 전, 당, 각, 합, 재, 헌, 누, 정 등의 글자가 들어있는 걸 아실겁니다. 이 글이 의미하는 것을 알면 그 용도를 짐작할 수가 있어요. '전'은 궁궐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을 뜻합니다. '전'자가 붙은 건물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만 사용할 수 있는 건물에만 붙이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는 궁궐 내의 어떤 건물에서도 지낼 수 있지만, 비록 세자라 할지라도 '전'자가 붙은 곳에서는 결코 지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업무공간이나 세자가 머무는 건물에는 '당'자를 붙였고요, '전'과 '당'의 부속건물에는 '합'과 '각'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휴게공간에는 '재'와 '헌'을 붙였고, 연회장소에는 '루(주로 2층으로 된)'와 '정'자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뜻을 아시겠죠?

 

 

 

 

 

 

 

자~ 이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차근 차근 하나씩 둘러 보겠습니다.

 

 

 

 

 

 

덕수궁에 왕비의 침전이 없는 이유는?

 

위 사진은 함녕전(咸寧殿)입니다. '전'자가 붙었죠? 위에서 설명한 글을 잘 읽으셨다면 임금이 사용한 건물이란 것을 이름만으로도 잘 알 수 있을겁니다. 이곳은 조선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1대황제이신 고종의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고종이 승하하신 곳도 바로 이곳이죠. 그리고 덕수궁 내에는 다른 궁궐과 달리 왕비의 침전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는 명성황후가 승하한 후, 고종은 다시는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버르장머리 없는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점령하고 이곳의 건물들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고종이 돌아가시자 마자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하는데요, 1931년에는 이곳 부지를 모조리 상가건물 용도의 땅으로 매각하려다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한발 물러나 외전과 내전의 주요전각만 남겨두고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날, 드넓던 덕수궁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곳이 이렇게 쪼그라든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열 받는 이야기는 앞으로 더 올려드릴텐데, 이쯤에서 이제 안을 둘러보겠습니다.

창신문(彰信門)을 들어서면 정관헌(靜觀軒) 이란 전각이 보입니다.

 

 

 

 

 

 

정관헌(靜觀軒)은 아까 보신 함녕전 뒷 편에 있는 정자기능으로 지은 건물인데요, 고종은 여기를 외국의 외교관들과 연회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관헌(靜觀軒)의 뜻은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란 뜻입니다. 당시 세계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을 생각하며 고뇌했을 고종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이곳은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모두 들어있는데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였겠죠? ^^*

 

 

 

 

 

 

오호~ 여기는 2층이군요. 이곳은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석어당'이란 곳입니다. '당'자가 들어있네요? 무슨 용도로 사용했던 건물일까요? 바로 임금이 업무를 보던 곳이지요.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곳이기도 한데요,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석어당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층전각입니다. 왜 유일하냐고요? 일본이 상가부지로 팔려고 건물을 다 때려부셨거든요.

 

 

 

 

 

 

모두 다 불타고 부서지고 이제 딸랑 하나 남은 2층짜리 전각,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앞에 일본인 관광객이 저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역사를 알려주고 싶군요.

 

 

 

 

 

 

석어당을 밖에서 구경하다보니 문득 2층은 어떻게 올라갈까 궁금해졌습니다.

안으로 들여다보니 저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군요. 저기로 다녔나봅니다.

 

 

 

 

 

 

마루바닥도, 문살도 아름답네요.

 

 

 

 

 

 

여기는 '즉조당(卽阼堂)'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의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가 전쟁이 끝나고 와서 머물렀던 곳입니다.

 

 

 

 

 

고종이 외교관들과 커피를 마시던 정관헌의 입구였던 창신문부터 지금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쓰고있는 '석조전'까지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아침에 산책을 나왔더니 오늘따라 햇빛이 따스합니다. 참새들도 저처럼 살이 오동통 올라있네요. ㅎㅎㅎ

 

 

 

 

 

 

사진찍은 시각 인증샷, 석조전 앞에 있는 해시계가 생각보다 정확하네요. 사진찍은 실제 시각은 오전 11시 40~50분 정도였습니다.

 

 

 

 

 

 

여기가 현재 덕수궁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석조전'입니다. 입장료가 후덜덜해서 우린 들어가지 않았어요. 4천원 ㄷㄷㄷ

 

 

 

 

 

 

미술관에서 바라본 전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그런데 뜬금없이 광명문이 미술관 옆에 서있습니다. 원래 광명문은 저~기 위에 말씀드렸던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요, 지금은 미술관의 흥천사 종과 자격루를 전시하기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광화문, 돈화문, 흥화문의 '화(化)'자는 무슨 뜻일까?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창덕궁에는 돈화문, 경희궁 입구에는 흥화문이 있는데요, 조선시대의 모든 궁궐의 정문은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화(化)'자는 백성을 바른 길로 교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왜 '화'자가 들어있지 않을까요?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인데요, 원래 위치는 위 사진의 중화문 앞 남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한제국이 출범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이 건설되면서부터 궁궐의 동쪽이 도시의 새로운 번화가로 개발됩니다. 이에 원활한 기능수행을 위해 동문인 지금의 '대한문'을 정문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는 대한문이 정문인데. 왜 '화(化)'자가 없는지 이제 아시겠죠?

 

 

 

 

 

 

나라를 바로 세우려했던 고종의 의지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세우기 위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의 권위를 되찾으려 덕수궁을 바로 세워 일으켰습니다. 그런 의지들은 여기 중화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중화전 바로 앞의 계단인 답도(왕이 다니는 건물 입구의 중앙계단)의 표식은 다른 궁과는 다릅니다. 예로 경복궁의 답도는 봉황이 새겨져 있지만, 여기는 황제의 권위를 뜻하는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요... (답도의 용문양)

 

 

 

 

 

 

그 의지는 왕이 앉았던 용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용상의 계단 아랫부분도 모두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치장을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것으로는 중화전의 천장 가운데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나라는 외세에 풍전등화가 되었지만, 끝까지 바로 세워보려는 고종의 의지를 옅볼 수 있습니다.

 

 

 

 

 

 

바깥의 문짝도 모두 황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황제로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중화전은 한국전쟁(1950.6.25) 때 폭격을 맞아서 지붕이 무너졌었는데 다시 고쳤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겪으며 오랜세월 시련을 겪었지만 그 자리에 지금도 서 있는 중화전이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지금은 반쪽만 남겨놓은 아름다운(?) 일본은 지금도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설명을 쉽게 잘 해드렸나 모르겠습니다.

서울 가볼만한 곳으로 적극 추천드립니다. 꼭 들러보세요.

 

 

부모님들, 아이들과 옛곳을 다닌다면 꼭 역사를 설명해주세요.

3.1절이 무슨 날인지 모른다고 아이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바른 역사를 가르치고 알려줘야할 의무는 어른들에게 있으니까요.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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