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덕수궁 중명전'과 '구.러시아공사관'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올해로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분들이 아직 많이 살아계십니다. 제 장모님 또한 일제시대를 살아온 분이신데,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무섭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우리 민초들이 불안에 떨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오늘은 대한제국이 주권을 실질적으로 상실했던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과 고종이 중명전을 짓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아관파천의 현장인 구.러시아공사관을 돌아보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이것만은 꼭 기억하도록 해요.

 

중명전이 만들어지는 계기는 이렇습니다. 1895년 조선에는 고정의 처가인 민씨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는데, 러시아와 손을 잡은 천러정권이었습니다. 일본은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대원군을 앞세워 쿠테타를 획책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씨정권의 수장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가는 '아관파천'을 감행하고, 사비를 털어 서양의 공사관들이 밀집한 이곳에 땅을 사들여 중명전을 짓기 시작합니다. 임금이 머무는 건물에만 붙는 이름인 '전(殿)'자가 들어 있는 걸로 미루어보면 이곳을 거처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사진은 1889년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찍은 사진입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는데, 1904년 대화재로 덕수궁이 불타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중명전'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볼게요. 참고로 이곳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고, 입구에 준비된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들어가야 합니다.

 

 

 

 

 

 

안으로 들어오니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따는 느낌이 먼저 듭니다. 1층에 4개의 방이 보이고, 2층엔 현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바닥의 타일도 옛날 그대로인데, 훼손을 우려해서 유리로 덮어 뒀네요. 건물 또한 근대유산이니 철저하게 보존하는 모습이 안심이 됩니다.

 

 

 

 

 

 

이 방에서 일제의 무력 앞에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고종이 머물던 이곳을 침범하고 왕과 대신을 협박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기에 이릅니다. 국가 간에 맺는 '조약(條約)'은 말 그대로 양국의 협의를 반영한 상호간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을사년에 이루어진 이 조약은 '양국의 협의'가 빠져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조건마저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을사조약은 을사늑약(勒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문서가 당시 작성되었던 을사늑약의 전문입니다.

 

 

 

 

 

 

총 6페이지로 된 이 문서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숨어 있는 일제의 뻔뻔한 의도를 의역한 것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사진은 클릭하시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어요.)

 

전문. 일본은 대한제국이 부강해졌다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래의 내용을 약속한다.

 

제1조.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총괄 지휘감독하며, 대한제국 백성의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나라와 어떠한 약속이나 조약을 맺을 수 없다.

제3조. 일본은 대한제국 황제의 외교업무를 감시하기 위해 통감을 둘 것이며, 통감는 언제든 황제를 만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의 어느 곳이든 필요한 곳에 관리를 두어 본 협약이 완전히 실행되도록 모든 사무를 처리하겠다.

제4조.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약속과 조약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 된다.

제5조.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뻔뻔하네요.)

 

 

 

 

 

 

이 글을 보면 일본이 협약문에 강제로 고종의 어새를 찍도록한 사실이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 참정관이었던 한규설은 강제로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반대하자 수옥헌 마루방에 가두어 버렸고, 주한미국공사였던 모건은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중명전 출구를 모두 봉쇄하며 무력시위를 자행했다고 증언하고, 당시 주한독일변리공사는 고종이 확고하게 "안된다."라고 말하자 일본군은 한국 대신들을 폭력과 노골적으로 강요하며 도장을 찍도록 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네요.

 

 

 

 

 

다른 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후, 고종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됩니다. 한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서방의 각 나라 원수들에게 친서를 전달해서 이 조약이 무효란 것을 알리려 했고, 끝까지 반대하던 조정 대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자결로 저항하게 됩니다. 저항의 의지로 서울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학교마저 휴교에 들어가 버립니다.

 

 

 

 

 

 

고종은 친필로 서방세계에 이 조약이 무효란 것을 알리는 친서를 보내는데, 위 문서는 영국 '트리뷴'지에 소개된 고종의 친서입니다.

 

 

○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1905년 11월 17일 일본 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은 황제가 승인하지 않았고, 국새를 찍지도 않았다.

2. 황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마음대로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3. 황제는 독립된 황제권을 한 치도 다른 나라에게 내주지 않았다.

4. 일본이 외교권에 대한 조약을 강제하는 것도 근거가 없는데, 하물며 내치(內治)상에 한 문제라도 인준할 수 없다.

5. 황제는 통감의 상주를 허락치 않았고, 황제권을 외국인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6. 황제는 세계 대국들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함께 보호해주고, 기간은 5년으로 하기를 원한다.

 

광무 10년 1월 29일(1906년 1월 29일)

 

 

 

 

 

 

외국으로 보낸 친서와 밀서에 찍은 고종의 황제어세가 이겁니다. 현재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세계는 절대 자국의 이익이 없이 다른 나라를 도와주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법은 없습니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 나라 또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참전한 것이었고,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도 한국의 이익을 위해 참전하는 겁니다. 자국의 이익없이 온전히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자국의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종은 서구 열강에게 조약의 부당함과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든 나라는 이를 무시했고, 또한 각국의 신문사 또한 일제의 침략 정책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스스로 힘을 키워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종은 열강에게 보낸 친서가 효력이 없자 이듬해인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게 됩니다. 위 사진이 이들이 가지고 간 헤이그특사 위임장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결국 회의 참석은 무산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국평화회의는 사실상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서로 불필요한 충돌이나 마찰을 피하고 서로 관할구역을 나누기 위한 대책 논의하는 곳이라 그랬을 겁니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위종은 회의장 밖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는 제목의 연설을 하게 됩니다. 연설문은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각국의 기자들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리게 되는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주의 열강들이 점령지 관할구역 나누는 자리에서 일개 점령지 처지였던 대한제국이 더 이상 얻을 것은 없었을 겁니다. 이 일로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피고도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열어 이들에게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하게 되죠. 그리고 이것을 빌미로 고종은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곳은 구.러시아공사관입니다. 현재 캐나다 대사관과 뉴질랜드 대사관 골목으로 1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정동공원 끝에 붙어 있습니다. 글 도입부에서 말씀 드렸듯이 이곳은 일제가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일로 고종과 세자가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의 현장입니다. 189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6.25 한국전쟁 때 거의 파괴되고 지금은 망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일본은 왜 고종을 죽이지 않고 그의 아내인 명성황후를 죽였을까요? 19세기에는 세도정치가 횡횡했는데 허수아비 왕을 세워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족보 끝에 있던 힘 없고 어린 고종을 즉위시키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정치를 하게 됩니다. 훗날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에 의해 물러나게 되자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민자영)가 실권을 잡게 됩니다. 사실상 고종은 실질적인 권력을 잡아 본 적이 없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니 외국의 세력들은 고종보다 그녀의 세력에 더 예의주시하게 되는데, 결국 친러정권을 세웠던 민씨일가가 못 마땅한 일본은 그녀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7편 계속...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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