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Nolan) 형제가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
명작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답다. '메멘토(Memento)'는 무려 19년 전에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지만 요즘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보다 훨씬 감각적이다.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900만 달러라는 초저예산 제작비에다 제작 기간도 단 25일 만에 완성되었다. 지금은 '다크나이트' 각본가로 이름을 알린 '조나단 놀란' 작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생인데, 메멘토는 조나단의 소설 소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형제는 집필 과정에서 서로의 글을 교환하며 크리스토퍼는 영화 '메멘토'의 각본으로, 조나단은 소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이야기로 무명의 감독과 소설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가 됐다.
개봉 당시, 베니스영화제, 선댄스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각본상도 휩쓸었다. 우리나라는 2001년에 개봉했는데 시간의 흐름이 앞으로 가다가 또 뒤로 흐르는, 당시로선 생소하고 신선한 시간 교차편집으로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극장을 여러 번 찾는 중생들도 많았다. 심지어 영화 블로거가 풀어놓은 해석을 보고 그제야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전직 보험 수사관인데 강간 살해당하는 아내를 본 충격으로 최근 '10분'만을 기억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다. 10분이 지난 일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늘 사진을 찍어 메모하고 중요한 사실은 몸에 문신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이라 믿는다. 다만 그가 또렷이 기억하는 하나는 아내를 죽인 범인 이름의 약자가 '존.G'라는 것.
레너드에게는 두 명의 친구 테디(존 판토리아노)와 나탈리(캐리 앤 모스)가 있다. 그런데 테디는 '나탈리를 믿지 마'라며 충고하고, 나탈리는 또 '테디를 믿지 마'라고 충고한다. 레너드가 찍은 테디 사진 뒷면에는 '그의 거짓말을 믿지마'라고 메모되어 있고, 나탈리의 사진에는 '동정심에 나를 도와주고 있다'라고 적혀있다. 누구의 말과 메모를 믿어야 할까.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황에서 이제부터 관객과 레너드는 범인을 찾기 위한 퍼즐을 맞추는 두뇌게임을 시작한다.
기발하고 영리한 시간 교차편집
메멘토를 보고 있으면 어쩌면 시나리오보다 편집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상실증과 복수라는 닳고 닳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단순히 나열했다면 이 영화는 아마 그저 그런 독립영화로 남지 않았을까. 1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레너드와 관객이 공정하게 추리할 수 있도록 대략 10개 정도의 시퀀스를 두 흐름으로 나누어 하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다른 하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시퀀스를 교차해 흘린다.
예를 들면 10-1-9-2-8-3-7-4-6-5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뒤틀려 흐르다 결국 이야기는 중간에서 만난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영상의 색깔로 구분하는 것도 신선하다. 거꾸로 흐르는 시퀀스는 컬러로, 올바로 흐르는 시간의 시퀀스는 흑백 영상으로 처리했다. 덕분에 뒤죽박죽으로 흐르는 정보의 파편으로 영화는 끝까지 왜 그리 되었나 진실이 궁금증하다. 그러니 집중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에 불과하다.
영화는 레너드가 한 남자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사실 마지막 장면이지만 교차편집으로 제일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관객의 궁금증과 의문이란 자양분으로 영화는 끝날 때까지 스토리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레너드와 관객은 서로의 기억을 짜맞춰 가며 각자의 진실을 경쟁하듯 쫓는다. 결국 모든 퍼즐을 짜 맞추었을 땐, 지금껏 내가 조합한 인과관계는 모조리 무시된 채 전혀 새로운 국면에 맞닥뜨린다. 보통은 반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반감되겠지만 이 영화는 알아도 상관없다.
레너드가 살인자 '존 G'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동안 관객은 그의 기억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모두가 레너드의 온전하지 않은 기억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레너드는 자신이 기록한 사진과 메모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고, 더 충격적인 건 레너드조차 불완전한 기억을 조작하고 다른 등장인물과 똑같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
✔ 몇 줄로 보는 메멘토 해석(스포일러 有)
인슐린으로 아내를 죽인 보험 사기꾼 새미의 이야기는 레너드의 이야기였다.
레너드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
레너드는 가정을 파탄낸 '존.G'라는 인물의 기억을 조작했다.
테디는 마약상 지미(나탈리 애인)를 존.G로 몰아 레너드가 죽이도록 유도했다.
반대로 나탈리는 테디를 존.G로 몰아 지미의 복수를 했다.
레너드는 이미 1년 전에 존.G를 죽였었다.
레너드의 현실 탈피 욕구와 주변 인물의 욕망이 계속해서 또다른 존.G를 만들었다.
일부 평론가들이 말하는 레너드 연쇄살인마 본능설은 동의하지 않는다.
레너드는 자신을 이용하는 테디를 죽이기 위해 고의로 기억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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