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라의 궁궐터였던 (반)월성과 계림, 그리고 첨성대까지 산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월성과 계림은 어제 포스팅했던 안압지의 도로 하나를 사이에두고 건너편에 있습니다. 혹시 경주를 여행하실 때 "왜 반월성은 아무 것도 없이 이렇게 벌판으로 내버려 둘까?"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혹시 있으신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반월성은 현재 발굴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그렇습니다. 드넓은 궁궐터라 발굴범위가 너무나도 방대해서 일부에서 조금씩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 멀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반월성을 산책할때 "이거 뭐야? 아무것도 없네?" 이러지 마시고 내 발밑에 천년을 잠들어 있는 유물들이 가득가득하다고 상상하고 걸어보세요. 그리고 눈앞에 아무것도 없으니 건물을 상상하기엔 더 좋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며 그 때를 상상할 거리도 많고요. ㅎㅎㅎ 아무튼 들어갑니다~
반월성은 현재 해자와 건물터, 그리서 허물어진 성벽 돌조각 정도만 남아있습니다. 해자란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벽 밖에 흘러가는 도랑을 말합니다. 그래도 해자의 물은 천년을 흘렀겠지요... 제가 본 경주는 고대부터 물관리를 참 잘하던 나라였던거 같습니다.
반월성 전도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나무만 있군요. 반월성의 정식명칭은 '월성'인데요, 반달모양처럼 생겼다고 '반월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위 지도에서 보면 현재는 월성과 안압지(동궁, 임해전지)는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아래의 옛날 지도에서 보면 왕이 살던 월성의 궁궐과 태자가 살던 동궁은 붙어 있었네요.
<반월성 옛지도>
지금 발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가득가득합니다. 언젠간 우리 후대손들에게는 이 유적지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겠지요. 월성이 궁궐으로 사용된 것은 신라 4번째 왕인 석탈해가 살게되면서 부터인데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실 월성에는 석탈해가 살기 전,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석탈해는 호공의 집터가 마음에 들어 호공의 집을 빼앗기 위해서 사기(?)를 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이튼...쯧)
사기의 내용이 뭐냐면 석탈해가 호공의 집 주변에 숫돌과 숯을 묻어 두고 호공을 만나 자신의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우겨 땅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였지요. 계획대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던 이 일은 결국 관청의 결정에 맡겨지게 됩니다. 조상대대로 대장장이를 했다는 석탈해의 주장에 따라 땅을 파보았는데 당연히 숫돌과 숯이 나왔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월성의 부지는 석탈해가 차지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작정하고 사기치는 놈들은 이길 수가 없나 봅니다.
이후, 다음 왕인 파사왕이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서 월성은 천년 신라의 궁궐이 됩니다. 천년 신라의 궁궐터가 왕이 사기쳐서 빼앗은 땅이라니... 아무튼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찾아서 월성에서 유일하게 형태가 보존 되어 있는 석빙고로 가봅니다. 석빙고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보존되고 있습니다.
석빙고의 용도는 다들 아시겠지만, 혹시 초딩이 검색했을 수도 있으니 잠시 적을께요. 석빙고는 얼음을 보관하는 현대의 냉장고 같은 건물인데요, 겨울에 언 얼음을 석빙고로 옮겨와 여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하던 곳입니다. 안의 구조를 보면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닥을 기울여서 녹은 물은 재빨리 밖으로 배출한다던지, 뜨거운 공기가 위로 뜨는 것을 알고 데워진 공기 배출구가 있다던지 등...
석빙고 옛 모습, 정면에도 석벽이 있었군요
예전에는 이 드넓은 땅에 전부 기와집이 올라가 있었겠죠?
저~ 기 멀리 아주 조그맞게 첨성대도 보이는군요.
근데 비가 꾸물꾸물 내리려고 하는데 저 멀리 빛 한줄기가 보이네요.
실제 눈에 보이는 빛내림과 사진은 많이 다르네요 ^^*
이제 계림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김씨왕조의 서막을 연 계림의 고목.
윗동이 다 잘려나가고 거의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끈질기게 새 가지를 뻣고 살아나고 있습니다. 계림은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입니다. 원래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시림'이라고 불렀는데, 닭과 관련있는 김알지의 탄생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이라 불리게 되었지요. 왜 하필 닭으로 이름을 지었을까요? 현대의 우리는 닭은 심심풀이 간식이나 야구 경기때마다 수천마리씩 돌아가시는 미물이지만 신라시대 때는 닭이 새벽을 연다고 해서 아주 신성시 했습니다. 실례로 불국사의 건물의 장식이나 단청들을 보면 닭모양의 장식이 많습니다.
참 오묘한 매력이 있지 않습니까?
계림의 저 끝에는 미지의 세계가 툭 하고 튀어 나올것만 같군요.
이제 첨성대 쪽으로 산책을 가 볼가요?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걸어가는데 왼쪽에 인왕동 고분군이 보이네요.
저 무덤에서 빛내림 사진 찍으시는 분들 참 많이 보왔습니다.
마치 부활하는 느낌도 들고, UFO가 착지하는 느낌도 들더군요.
머리에 알루미늄 모자를 써야겠다는 ㅋㅋㅋ
인왕동 고분군 앞에 집터가 있네요.
여기서 잠깐~!
경주에서 보면 무덤들이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릉(陵), 원(園), 총(塚), 묘(墓), 고분(古墳)의 뜻을 알고 계시나요?
예전에 제가 네이버에서 융,건릉 포스팅에서 썼었습니다만, 티스토리는 첨이니 다시 적어볼께요.
능(陵)은 왕 또는 왕후의 무덤을 말합입니다. 그중에서도 주인을 확실하게 알수있는 무덤만 릉(陵) 이라고 합니다. (무열왕릉)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입니다. (효창원)
총(塚)은 주인을 알수없으나, 거기서 중요한 유물이 발굴된 경우인 무덤을 말합니다. (천마총)
묘(墓)는 장군, 신하 등 왕족이아닌 일반인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묘라고 부릅니다. (김유신 묘)
고분(古墳)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특별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무덤입니다.
요고 헤깔리는 분들 엄청 많습니다.퀴즈쑈 같은데도 가끔 나오지요.
첨성대로 왔는데 날이 저물었네요. 실루엣만 보겠습니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어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고 확실히 외웠지요 ㅋㅋㅋ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학교에서는 천문대라고 배웠습니다만 정확한 증빙자료가 있지 않는 한, 역사는 언제나 정황으로 예측한 추측일 뿐입니다.
자 어떤 주장이 있는지 볼까요?
학자1
첨성대는 해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규표로 보여진다. 이를 통해 춘분, 추분과 하지, 동지를 알았을 테고 이를 농사에 이용했을 것이다. 그 좁은 곳에 천문관들이 매일 올라갔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혼천의 같은 관측기기를 상시 설치하기엔 첨성대가 부적절하다고 본다. 첨성대는 바로 해시계의 바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첨성대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은 물론 계절을 관측했다.
학자2
첨성대는 종교적인 숭배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첨성대를 만든 분이 선덕여왕아닙니까? 그분이 유언으로 나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했는데요. 그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하늘이거든요. 그럼 수미산은 뭐냐? 도리천 중심에 솟은 산으로 불교의 우주관을 담은 신성한 곳입니다. 이 수미산이 첨성대와 비슷한 모양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첨성대는 신성한 수미산 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종교적인 숭배물이라는 것이죠.
학자3
첨성대는 우주 우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첨성대는 천신이 계신 하늘과 자신이 머물고 있는 땅을 연결하는 통로였다는 거죠. 신라인들은 예로부터 우물을 신성한 세계와 지상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 보았습니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탄생한 곳도 바로 우물이죠. 첨성대처럼 땅위에 쌓아올린 우물은 바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힘들었던 선덕여왕은 아마도 첨성대를 통해 하늘과 자신을 연결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스마트투어가이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반월성, 계림, 첨성대 찾아기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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