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음악은 엔니오 모리꼬네. 적어도 저에겐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 결정돼 버렸습니다. 건조하고 기름기 쏙 뺀 담백한 연출력을 자랑하는 감독인 클린트 옹(1930년 生)과 영화 <황야의 무법자>와 같은 각종 무법자 시리즈와 <시네마 천국> 등의 OST로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음악계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인 엔니오 옹(1928년 生). 이 두 명의 감독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영화에 참여하면 그 영화는 믿고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품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정돕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인데요, 이라크전쟁에 4번이나 파병을 다녀온 실존인물인 '크리스 카일'의 에세이를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크리스는 미국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 씰' 소속의 저격수인데요, 수차례 파병에서 공식적으로 160명 사살, 비공식적으로는 255명을 저격한 최고의 스나이퍼로 등장합니다. 그는 전쟁 당시는 미국의 영웅으로 칭송 받기도 했었지만, 세상에 그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있다면 뒤로 길게 늘어진 어둠의 그림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적이나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의 가족들에게 그는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악당 중에 악당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가 말하는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 분)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사격술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웁니다. 스포는 배제하고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씀 드리면, 카일의 아버지는 세상에는 양과, 늑대, 그리고 양치기 개(sheepdog), 이렇게 세가지 부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악당인 늑대를 응징하는 양치기 개가 되라고 주문하고, 누군가 가족을 공격하면 가차없이 응징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자란 카일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미국을 공격하는 적을 응징하기 위해 네이비 씰(미해군 특수부대)에 입대하는데, 훈련이 끝날 무렵 9·11테러가 일어납니다. 그는 철저한 양치기 개가 되어 알카에다를 응징하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255명이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갑니다.
전쟁터에서는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열 살도 안돼 보이는 아이를 총으로 죽이는 건 누가 봐도 악(惡)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대전차용 수류탄을 들고 미군에게 달려가면 반대로 그 아이가 '악'이 되는 걸까요? 그 아이에게 겨누고 있는 나의 총구는 '선'이며, 그 아이가 우리에게 겨눈 총은 '악'이라고 규정 짓는 건 온전히 자기 편의적인 발상이고 오만입니다. 이 상황에서 확실한 건 서로를 '악'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 자명한 일이겠죠. 결국 이 둘은 선악을 구분 짓기도 전에 모두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카일은 미군에게 대전차 수류탄을 들고 다가서는 열살 남짓의 아이를 사살합니다. 그의 첫 번째 살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임신한 아내 타야(시에나 밀러 분)를 두고 전쟁에 참여한 카일은 이후, 아이가 두 명이 될 때가지 네 번에 걸친 파병을 가게 됩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놓고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난리법석 전쟁통에서 돌아온 미국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낯섭니다. 이라크에서는 지금 이순간도 전우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은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태하고 무심합니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전쟁에서 돌아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심각하게 겪는 카일에게 그 어떤 비난도 동정도 보내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악마가 가만 놔두질 않는 그의 현실을 덤덤히 카메라는 따라 다닙니다.
전쟁은 그 어떤 명분이나 당위가 있더라도 양쪽 모두를 이전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미국에서의 삶이 또 다른 전쟁터가 되어버린 카일을 보며 클린트 옹은 더 큰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습니다. 그를 양치기 개로 만든 양과 늑대는 이제 그를 어떻게 구원해줄 수 있을까요?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전쟁터에선 그 누구도 '선(善)'이 될 수 없습니다. 동료를 살린 천사이자 동시에 적을 무참히 처단하는 악마, 내 아이에겐 다정한 아빠이지만 적의 아이들은 죽여야 하는 그는 착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천하의 둘도 없는 악당일까요? 튀틀린 선과 악은 모두 '악(惡)'입니다. 결국 알카에다는 끝까지 살아 남았고, IS는 세력이 커져만 가고, 유럽은 본토에서 테러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실존인물 크리스 카일의 연기를 맡은 주연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는 압도적입니다. 최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2013>과 <아메리칸 허슬, 2014>에 이어 3년 연속으로 오스카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를 만큼 그의 연기력은 물이 오른 것 같네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의 믿고 보는 영화입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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