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의 스님 ‘연기조사’가 구례의 화엄사를 지었습니다. 한때 3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의 땅에 꽃피우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지리산 노고단 남쪽 자락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고찰이 되었습니다. 천은사와는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대찰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이라 언제나 산행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내에는 국보 제67호인 화엄사각황전을 비롯해서 국보 4점과 보물 8점 등 중요 문화재로 가득 차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직 화엄사는 몇 킬로 남았는데 매표소가 멀리부터 나와 있군요. 위 전각은 일주문이 아니고 일주문 모양을 하고 있는 매표소를 알리는 문 같습니다. 편액에는 ‘지리산대화엄사’라고 적혀 있네요.
매표소에서 몇 킬로 정도 차를 더 달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차장에서 절로 들어가는 길이 대나무와 데크로 운치 있네요.
앞에 보이는 저 문이 화엄사 일주문입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는 직선형으로 이어져 있는데요, 문들이 정확히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약간씩 비켜서 있습니다. 덕분에 끝이 보이질 않아 걸을수록 절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주문은 화엄사의 규모로 비춰 볼 때 약간은 소박한 느낌인데요, 다른 사찰과 다른 특이한 점은 기둥 옆으로 담이 쳐져 있고 문이 달려 있습니다. 일주문의 정신은 누구라도 출입할 수 있는 차별이 없는 세계라는 의미가 있지만 이곳은 역사적으로 욕심 많은 관리들과 왜적의 침입이 많았던 아픔이 있어 그런지 원치 않는 손님의 침입은 막겠다는 의지도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멀리 금강문이 보이고 바닥은 돌로 되어 있는 것이 독특합니다. 사찰에는 보통 3개의 문이 있는데요,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 이렇습니다. 간혹 금강문이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있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건 불법을 훼방하는 사악한 세력들을 경계하기 위한 문입니다. 문 안의 좌우로는 두 분의 금강역사 조각상이 지키고 있죠.
금강문을 지나니 왼쪽으로 템플스테이 장소가 나오네요. 최근에 지어진 듯 보이는데, 규모가 아주 큰 것 같네요. 그런데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사진 찍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군요. 그래도 씩씩하게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전에 다른 글에서 천왕문 설명을 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기억이 안 나네요. 천왕문 안에는 네 명의 문지기 상이 있는데요, 동.서.남.북과 봄.여름.가을.겨울을 지키는 수호신이 서 있습니다. 원래는 인도신화에서 불교를 수호하던 신들인데, 석가모니의 설법을 받고 반해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계단 위로 바로 보제루가 보입니다. 이 사찰엔 금강문이 추가된 대신 해탈문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보제루는 승려들과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건물인데요, 내부엔 별다른 것 없이 널찍한 마루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제루 왼쪽으로는 범종각이 놓여 있군요. 원래 이곳에는 에밀레종에 버금가는 20톤의 신라화엄대종이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군이 종을 훔쳐 섬진강을 건너다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뜨렸습니다. 이후 1975년에 종을 만들었는데 담양의 보광사로 이관했고, 이 종은 2013년에 다시 만든 겁니다.
보제루의 문살.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 문이 정말 아름답죠?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의 핵심은 ‘정성’이 아닐까 싶네요.
보제루 툇마루에 앉으면 정면으로 대웅전(보물 제299호)이 서 있어요. 사진에선 안보이지만 왼쪽으론 각황전(국보 제67호)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서 있는데요, 화엄사를 이루는 두 중심축입니다. 원래는 대웅전이 중심이어야 하지만, 거대한 규모와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각황전에 대한 관심으로 중요 순위에서 조금 밀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올라가 보겠습니다. 바닥의 연꽃문양 돌판 위로 걸어가면 대웅전 안에 있는 불상이 정확히 보입니다.
아참, 그리고 대웅전과 각황전 아래의 마당에는 동쪽(동오층석탑, 보물 제132호, 사진 왼쪽)과 서쪽(서오층석탑, 보물 제133호, 사진 오른쪽)으로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두 탑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서 있지 않고, 각 건물 앞쪽으로 서 있는데요, 각 건물과 짝을 이루고 있는 구조입니다. 두 탑 모두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대웅전이 우선순위에서 살짝 밀리는 이유가 있군요. 대웅전 왼쪽에서 마당을 바라보고 서 있는 각황전은 한국에서 가장 큰 불전인데요, 내부의 공간으로 보나 외부의 위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내부를 보여드리고 싶지만 화엄사는 불상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내부사진을 보여드릴 수 없는 점은 안타깝네요.
각황전 바로 중앙 앞으로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큼직한 석등이 하나 서 있습니다. 현재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등은 건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큽니다.
그리고 각황전 오른쪽엔 사자탑이 하나 서 있는데요, 이건 흥미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쓰임새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사자 네 마리가 사각형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데, 각 면에는 사천왕상이 얕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는 홍매화가 한 그루 심어져 있어요. 깊은 산속이라 그런지 아직 매화가 피질 않아 휑한 느낌이지만, 4월쯤에 만개하면 검붉은 빛으로 물든답니다. 붉다 못해 검은색이 띈다고 해서 ‘흑매화’라고도 부릅니다. 각황전이 숙종28년(1702년)에 지어졌는데, 그때 같이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313년이 되었네요. 적어도 300번은 넘게 꽃을 피웠겠군요. 대단합니다.
경내를 둘러보다 뒤편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을 발견합니다. 동백 숲 사이로 난 이 길은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인데요, 이 108계단을 오르면 ‘효대’라 불리는 삼층사사자사리석탑(3층 4사자)과 석등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보수공사 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올라가 보질 못해 애석하네요. 효대를 못 봤다면 화엄사에 안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1,500년 고찰 화엄사. 많은 사찰을 다녀봤지만 규모 면에서나 경내 보유한 건축물과 탑 등 국보/보물의 예술성으로 보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지리산의 위용으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짐이 없는 대찰이었습니다. 구례여행 계획하시거나 산수유축제 보실 분들은 이곳은 꼭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저 대신 효대도 꼭 보시고요. 쩝……
+ 입장료 : 어른 3,500원, 청소년 1,800원, 어린이 1,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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