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 '진남관' | 여수가볼만한곳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여수는 항구와 공업이 발달한 도시죠. 옛말에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하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 답게 이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진남관'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왜구를 크게 물리치자 여수는 수군 방어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는데, 조선 성종 때는 지금의 해군사령부인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고, 고종 때 패영 될 때까지 거의 400여년간 조선 수군의 중심지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의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고, 전쟁 이후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되자 여수시는 삼도수군통제영이 되기도 했었죠. 그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오늘 가 볼 진남관입니다. 현재 국보 제 304호로 지정되이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망해루를 통해 계단을 조금 오르면 만나게 됩니다. 이곳은 주차료가 1시간 이내 주차하면 무료이고 입장료는 없습니다. 모두 둘러보는데 한시간이 채 안걸리는 곳이니 전부 무료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남도의 어느 도시를 가던지 충무공의 발자취를 많이 발견할 수 있죠. 그런데 그가 방어를 위해 건물만 세운 게 아닌, 실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여수가 아닐까 싶네요. 여수는 현재는 공업도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에서 국토방위의 요지였고, 이충무공의 유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진남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 담쟁이 넝쿨이 올라탄, 뭔가 멋있는 게 들어 있을 것 같은 건물이 하나 있네요. 들아가 보겠습니다.

 

 

 

 

 

 

여긴 '임란유물전시관'이네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작성했던 난중일기(임진일기, 국보 제76호), 이순신 장군이 친척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묶어 만든 책인 서간첩(국보 제76호)도 있습니다. 원래 충무공은 일기에 제목을 붙이지 않고 글만 써내려 갔는데, 정조 때에 들어 '이충무공전서'라는 이름으로 편찬작업을 하면서 편의 상 '난중일기'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전시관을 나와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어마어마한 전각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진남관입니다. 이 터는 여수의 종고산 기슭에 있는데, 한산대첩에서 큰 승리를 이루었는데 그때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이 바로 여깁니다. 당시 어명을 받은 충무공이 군사를 지휘했던 곳이라는 거죠. 옛터엔 현재 당시에는 없었던 진남관만 남아 있습니다. 혹자들은 이 건물이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지휘했던 지휘소로 알고 계신분들이 많은데, 사실 정유재란 때 당시의 건물은 모두 불타고 그 이후에 지어진 객사 건물입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전라좌수영의 중심 지휘소인 '진해루(鎭海樓)'가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선조시절 삼도통제사로 새로 부임한 이시언이 새로 지은 객사(客舍)'인 이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객사는 지방에 출장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 같은 곳인데, 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출입을 하고 내부는 모두 호텔처럼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죠. 그래서 지금은 건물이 쓸데 없이 커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길이 75m, 높이 14m이며, 정면 15칸 측면 5칸의 총 75칸 규모에 이르는 한국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건물입니다.

 

 

 

 

 

내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원래는 구획이 나뉘어져 있어서 지금처럼 황량해 보이진 않았을 거에요. 기둥 위로 굵직한 대들보가 걸려 있어 실내공간이 훨씬 웅장해 보이네요.

 

 

 

 

 

 

진남관은 조선시대 객사 용도의 건물이었지만 사람들이 기세 좋은 이 건물의 외형을 보며 수군의 지휘본부로 오해하는 건 어느 정도 애해가 되네요.

 

 

 

 

 

 

팔작지붕을 떠받이고 있는 기둥은 둘레가 2.4m나 되는데 무려 68개에 이르는데, 1910년부터 1960년대 까지는 학교 교실로 사용됐는데 그로 인해 원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1959년 한 차례 보수할 때에는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벽체만을 뜯어냈다고 하네요.

 

 

 

 

 

 

건물 뒤편에는 작은 우물도 하나 있던데, 지금도 깨끗한 물이 졸졸 나오고 있어요. 이곳에 누군가 살았다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앞마당에는 여수석인상이 하나 서 있는데 충무공이 왜적에게 교란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좌수영 앞마당 곳곳에 석인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입구에 딱 하나만 서 있군요. 실제로 왜군들은 돌사람이 있는 곳을 피해 공격해오다 매복에 걸리기 일쑤였다고 해요. 원래는 일곱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석인상이 무신이 아니고 문신인지, 그리고 바다를 등지고 진남관을 보고 서 있는지는 의문이네요.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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