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와르 장르적 본능에만 충실한 영화 '아수라'

여행, 익숙함과 편리함을 버리고 짊어질 수 있을만큼만 소유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를 떠미는 것.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참았던 두통이 스믈스믈 느껴진다. 문화가 있는 날인 어제 이 영화를 보았는데, 매표소부터 전산장애로 길게 줄을 서 한참 기다린 후에야 표를 받아 들었다. 영화 시작 전부터 극장은 이미 아수라장이다.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정우성 때문도, 곽도원 때문도, 황정민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사나이 픽처스'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베를린> 등 오로지 사나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느와르'의 색을 입고 짙은 인상을 남기는 흥미로운 영화들만 만드니 수컷들은 두 손 들고 반길 양화제작사가 아닐까. 아무튼...

'아수라(阿修羅)'는 원래 싸우기를 좋아하는 얼굴 셋에 팔이 여섯 개 달린 귀신을 말하는데, 탐욕과 이기심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는 묘하게 한국사회를 '아수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타나토스처럼 우리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자신을 파괴하고 학대하며, 타인마저 파괴시키려 서로 공격하고, 결국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 걸까. 영화는 타나토스와 똑 닮아 있다. 민선시장과 검찰, 경찰,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괴팍하고 이기적이라면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일 게다. 영화처럼 그 끝은 자멸일 거고.


'아수라'에서는 선(善)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쁜 놈, 더 나쁜 놈, 더더 나쁜 놈들 밖에 없다. 오로지 악과 악이 사투하는 절대지옥만 있을 뿐. 신도시 개발 비리, 마약유통, 납치, 살인교사, 뇌물공여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민선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 박성배의 수하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비리 형사 한도경(정우성). 한도경의 약점을 잡아 박성배를 체포하려고 협박, 불법 도감청, 감금, 폭행을 저지르는 악랄한 공권력 검사 김차인(곽도원) 등, 누가 더 나쁜지 견주기 힘들 만큼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극은 시장과 검사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도경(정우성)의 시선을 쫓는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고와 꼬여만 가는 관계 속에서 그의 선택은 유리컵을 잘근잘근 씹으며 모든 걸 처절한 '아수라'로 만드는 것. 온갖 모략과 배반, 음모가 판치는 지저분하고 음침한, 마치 힘이 쎈 자만이 살아남는 동물의 왕국 같은 이 도시에는 질서도 윤리도 없다.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한 본능만 남아 있을 뿐. 하지만, 영화에서 왜 이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지에 대해선 불친절하게도 공감 가는 설명이 없다. 그냥 이들의 처절한 난투극을 잔인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한도경을 향해 약을 주는 자와 병을 주는 자. 시장과 검사의 역할은 종종 서로 뒤바뀐다. 누가 편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모두가 적이 되어버린 이 도시는 혼돈의 세계 '아수라'. 어쩌면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끝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려갔는지도 모른다.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잔혹한 '타나토스'가 지금의 우리가 처한 시대란 메시지일까?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밀려온다. 이러한 측면에선 이 영화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아수라'는 영화가 가지는 본연의 가치로 본다면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개인적인 생각) 등장인물 행위에 대한 적절한 당위도 부여하지 않고 있고, 오로지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묘사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할까. 전에 본 적 없는 롱테이크 자동차 경주 장면 등 빼어난 앵글들도 종종 보이긴 했지만, 오직 몰아치기만 하는 답답하고 둔탁한 극 전개는 조금 아쉽다. 마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미리 그려 놓고 과정들을 자극적인 장면들로만 주섬주섬 만들어 간 느낌이랄까? 관객의 눈은 사로잡았지만 그들을 클라이맥스로 몰고 가는 데는 실패했다. '사나이 픽처스'의 장르적 본능에는 매우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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